목사ㆍ선교사후보생모집

세계선교신학

바로가기

설교게시판

상세보기

뿌린 대로 거둔다/ 마7:22-23/ 김병삼 목사/ 2013-10-03

2013-10-03|조회 1077

뿌린 대로 거둔다

마7:22-23




산상수훈 말씀을 다 마쳐가는데,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도전과 근심을 주는 것 같습니다. 결국, 말씀대로 살려는 자에게는 기대감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심각한 말씀을 오늘 주시네요.
오늘 말씀이 왜 우리에게 근심이 될까요? 어쩌면 순종할 만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순종할 만한 자신이 없다는 말은 그 말씀은 들었으나 우리의 삶에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우리 주님은 실천하지 않는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듣는 것으로 끝나면, 믿는 것으로 끝나면 우리를 그렇게 괴롭게 하지 않을 텐데,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말씀에 대한 헌신과 순종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말씀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겠다는 제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라는 것이죠. 제가 Facebook에 써놓았던 글입니다.
"이것이 순종이다!"
오늘 새벽 집회를 인도하며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종은 연습이다!
우리가 흔히 꿈꾸는 것이 있죠. " 위대한 일에 멋진 순종을 하는 것"
하지만 순종이 연습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와 다를 때가 많으며, 믿음은 상식을 뛰어넘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걸을 수 없을 것 같고, 걷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하지만, 어느 순간에 걷고 있는 모습.

순종이 마치 그렇습니다. 내 상식을 벗어나는 일에 겁이 나기도 합니다.
나의 인내를 벗어나면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나면.
걷게 된 아이에게 기는 것보다 걷는 게 편안해지듯,
순종하면 불순종보다 더 큰 평안함이 찾아옵니다.
순종의 기쁨을 맛본 자들에게는 다음의 순종이 기다려집니다.

이렇게 순종의 내공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위대한 순종의 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작은 일에 순종하며 당신의 영적 내공을 쌓아 가십시오.
순종이 뭐냐고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명백한 곳에 당신의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각양 순종을 기대합니다. 비록 내공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겠지만,
순종의 검은 띠를 따기 위해 연습합시다.
순종의 검은 띠를 차고 예배당을 가득 메운 이들과 함께 예배하는 꿈을 꾸며.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선택을 요구하지 않나요?
순종할 것인가? 불순종할 것인가?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과 뜻, 그리고 우리의 삶을 헌신하겠다는 것이죠.

오래전 국민일보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호수에서 작은 배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한 늙은 선원이 있었습니다. 그 노인의 한쪽 노에는 ‘믿음’,다른 쪽 노에는 ‘실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 승객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노인은 ‘믿음’이라는 노를 힘차게 저었습니다. 배는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맴돌았습니다. 이번에는 ‘실천’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역시 배는 반대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 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두 개의 노를 함께 저었습니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노인은 승객을 향해 잔잔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 없는 행위’와 ‘행위 없는 믿음’은 모두 제 자리를 맴도는 배와 같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믿음과 실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믿음의 실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언어의 유희일 뿐입니다.


위장된 순종
오늘 본문 22-23절을 보세요.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제가 참 좋아하는 글쓴이 중에 하나가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입니다.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전을 주었죠. 지난번 강사로 초청한 이루다 목사님을 통해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성공적인 사역으로 부흥을 경험하고 있던 목사님에게 기자가 물었답니다.
“목사님! 교회가 부흥되어 참 좋겠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하죠.
“우리 교회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보통 하루에 3구 정도의 시체가 들어옵니다. 1년이면 1,000개의 묘지가 생기는 셈이죠. 그런데 아무도 공동묘지가 부흥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도전이 아닐까요?
우리가 평생을 주님을 믿는다고 했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설교하고, 봉사하고 했는데, 심지어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는 권능을 행했는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를 모른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적어도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 사람의 신앙고백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여, 주여” 상당히 열광적이라는 느낌이 나지 않나요?
또한, 이 사람의 신앙고백이 공개적이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역을 열심히 한 것 같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던 것도 사실인 모양입니다.
또한,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주님의 이름으로 뭔가 권위를 더해 설교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문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조차 이런 일을 행하리라는 것이 성경이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이죠.
마태복음 24장 24절에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사용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고백을 거부하신 이유는 말로는 하였으되 도덕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삶과 연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 할지라도, 절대로 주님의 주권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이름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행하는 수없이 많은 기적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확실하게 중대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즉,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죠.

그들이 권능을 행했을지 모르지만, 선하지 않고 악했습니다. 그들이 입술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몇 달 전 사강지방에서 연합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돈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명예에 대하여 유혹을 느끼시나요? 안 느끼시나요?”
참 의외의 대답이 크게 나왔습니다.
“어떤 유혹도 받지 않습니다!”
놀랍기도 하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자리에 어떤 유혹도 받지 않는 천사 같은 사람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말입니까?
“주여, 주여!” 하면서 의로움을 드러내고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 위선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에 하나님의 능력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집을 세울 것인지
오늘 말씀의 전반부가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대조했다면, 후반부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24절에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있고, 26절에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습니다.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는 자는 마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으며,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알 수도 없으며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 집의 진가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성경공부 때만 사용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너희는 모래사장에 집을 지은 미련한 목수와 같다.”

그러나 그때가 옵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들은 대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심판할 때가옵니다.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뒤흔드는 때가 올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가운데 가장 깊은 축복의 원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지금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경 동경과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문에 1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당시 동경의 3분의 2 정도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제국 호텔만큼은 끄떡하지 않고 유리창 5개만 깨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호텔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안전했습니다.
제국호텔은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건축 당시 4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기초공사만 2년을 넘게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초공사를 하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과 돈을 들인다고 욕했지만, 라이트는 묵묵히 4년 만에 제국 호텔을 완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진가가 드러난 것은 예측할 수 없었던 관동 대지진 때였습니다.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고, 귀로는 듣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행하는 믿음’이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유월절 사건을 기억하시나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종살이를 벗어나기 전, 마지막 재앙으로 죽음의 사자가 모든 집을 덮치고 지나갔습니다. 다음날 큰 울음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가 죽은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만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그 문을 넘어간 날 ‘pass over’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 말씀과 경고를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날 밤 심판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말씀을 들은 자와 말씀을 듣고 행한 자 사이에서 명확하게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도 똑같이 집을 짓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석 위가 아닌 반석을 피해 땅에 집을 지었습니다. 외관상으로 더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현명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아름다운 집을 짓다니 말입니다.
영적으로 본다면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위에 삶의 주춧돌을 놓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을지, 아니면 욕망을 이루는 방법을 찾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되는데, 우리의 의와 공로로 서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고 행했는가로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뿌린다는 것은 지금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것이죠. 이렇게 당연한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진리라는 것이 참 신기하지 않나요?
제가 요즘 운동을 하는데 코치가 저에게 심각하게 묻더군요.
“꼭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까? 안 믿어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착하게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는 것이 착하게 사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 마땅하겠죠.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선행의 동기가 구원과 관계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믿음의 행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중국 청두에 갔다가 ‘모죽’이라는 대나무에 대해 들었습니다. 모죽은 씨를 뿌리고 5년 동안은 작은 순이 나오는 것 말고는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섯 번째 해가 끝나갈 무렵의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에도 몇십 센티씩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 거의 25미터에 이르도록 큰다는 것입니다.
신기하지요? 그러니까 모죽은 그 5년 동안 자라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땅속에서 뿌리를 키우며 도약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때가 오면 다른 어떤 식물보다도 빨리 그리고 높이 커 나갑니다.
우리는 저마다 ‘기회’를 기다립니다. 인생을 한 방에 역전시킬 수 있는 황금 같은 기회라면 더욱 좋겠지요.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만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기회란 ‘준비’의 동의어입니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높이, 그리고 오래 뜬다는 날이 있습니다. 양력 6월 21일 경인 ‘하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날이 일 년 중 제일 더운 날이 아니라는 것을요. 가장 뜨거워지는 날은 그 이후로도 태양이 계속 대지를 달구고 난 뒤인 8월 초순입니다. 자신이 최정점에 이른 6월 하짓날에 가장 뜨겁지 않다고 태양이 섭섭해하거나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기회가 오지 않은 때가 실은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준비하세요. 모죽처럼, 태양처럼.

우리 인생에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시편 126편 5~6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기도고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늘 나의 실력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의지할 만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가 늘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어쩌다 낙심하고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해야 할 기도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씨를 뿌렸습니다. 물 위에 식물을 던지는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믿음의 씨앗을 던졌습니다. 인생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산 인생이 후회함이 없도록 축복해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선행적 은총으로 우리가 모두 들었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사는 것,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은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때가 만날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뜻이 내게 임했는데, 가슴 뜨겁게 사명을 주셨는데 왜 우리는 실패하고 좌절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조금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과 하나님의 때를 안다는 것이 조금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죠.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조급함으로 좌절을 느끼든지, 자신의 열심에 지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진정한 믿음은 ‘기다림’이 아닐까요?
내 마음의 열정이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그르친다는 표현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열정이 자신의 욕망으로 변질하는 것을 보죠.
제가 그랬습니다. 내 속에 끓어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참 열심히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열정 후에 찾아오는 기쁨보다는 갈등과 탈진이 찾아왔죠.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제 속에 조급함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안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난 6월 사역자들이 함께 모여 전반기 사역을 정리하며 워크숍을 가졌는데, 그때 썼던 페이스북의 내용으로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만나 교회 사역자들이 전반기 사역을 정리하며 발표하고 워크숍을 가졌습니다.
‘만나 교회 만세!’
사역자들을 통해 정말 멋진 말과 생각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참 감사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가슴 부풀어 오르는 말, ‘우리의 사역을 통해 한국교회에 solution을 제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기대감까지.

좋은 사역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기다림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되지 않던 것이 시간을 통해 서로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새로운 사역의 지경을 열어주시는데, 우리의 분주함으로 듣지 못함이 문제임도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무슨 말로 자랑할 수 있으리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격 뭐 그런 것이 있는 하루였습니다.
정말 기분 좋게 교역자들과 사모들이 함께 김수현이 나오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조금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영화였지만, 그 영화에 열광하는 십 대와 이십 대를 생각하며, 영화보고 유명한 쉐프 에드워드권이 오픈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서로서로 격려하며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때에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그래서 만나 교회에서 사역함이 큰 축복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외쳐봅니다.
“만나 교회 만만세!”
하나님이 쓰실 것에 대한 기대감!
하나님의 때가 하나님의 뜻을 만나는 역사가 있는 하루가 되기를.


김병삼 목사(만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