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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흥정하지 말아라!/ 마7:7-12/ 김병삼 목사/ 2013-10-03

2013-10-03|조회 1233

하나님과 흥정하지 말아라!

마7:7-12




[마태복음 7:7-12]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부적절한 이해들
오늘 본문부터는 예수님의 관심이 달라집니다.
이전까지 사람들과의 관계였다면 여기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의 통로로 열어놓으신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축복인 것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영혼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는 설교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지만, 기도는 하나님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도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기도의 축복을 활용하도록 만들어주신 실천서일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지나갈 때, 상황을 불평하거나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기엔 소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이야기하기에는 관계가 부족하다고 느끼기에 적극적인 기도를 꺼리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본문 7~8절에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부분은 존 스토트의 책에서 이렇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에 있으면 구하고, 어머니가 가까이 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면 찾고, 어머니가 방 안에 있어 접근하기 어려우면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다.”

오늘 말씀은 이 부분을 잘못 이해하는 데서 오는 기도에 대한 오해를 제거하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모습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오늘 기도에 대한 권면이, 마치 우리에게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하거나 아니면 그분을 들볶아서 그것을 주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히려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것을 다 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렇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해야만 하나님이 주신다고 생각을 하는가? 인간 부모는 자기 자녀가 필요한 것을 구할 때까지 주지 않고 기다리는가?

이 부분에 대하여도 존 스토트는 그의 책 [산상수훈]에서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해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 드릴 때까지는 그분이 그것을 모르시기 때문도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할 때까지는 그분이 내키지 않아 하시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련된 것이다. 문제는 그분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리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오해를 극복해야 합니다. 마치 기도로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거나, 특별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오히려 복종시키려 했던 태도에서부터 말입니다.
바른 이해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기 때문에 구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인식하고 겸손하게 그분께 의지할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4장 2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라고 말씀하죠.

또 하나의 부적절한 이해는 본문 11절에 기인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텐데 꼭 기도해야 하는 건가요?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과 아버지로서 주시는 선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든 안 하든,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선인과 악인에게 공통으로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즉 자연의 법칙입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때가 되면 비가 오고, 햇살이 비칩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자에게 호흡을 주시며, 신앙과 관계없이 때가 되면 모두 죽습니다.
즉, 이 세상에 피조 된 모든 인간에게는 창조하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가 적용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선물입니까?
하지만 구속의 은혜와 선물은 이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보편적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같게 구속의 은혜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0장 12~13절에 보면,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자가 누리는 축복이 있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입니다.
날마다 죄 사함을 경험하며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이 세상의 악함 가운데서 주시는 평화, 그리고 소망 가운데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굶어 죽을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는 분!
사실 오늘 말씀이 조금은 꺼림칙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다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좌절을 경험해야 합니다. 실제 우리가 구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7절의 말씀은 11절 말씀과 묘하게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7절만 존재한다면 우리가 믿는 신앙은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 이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요술램프에서 나오는 알라딘의 하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게다가 신앙적으로 성숙하고 민감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약속 때문에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고 기도하지만, 그 내면의 일이나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당장 매를 들고 때리는 부모의 모습 이면에 있는 사랑을 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들어서 알지만, 그 생명의 신비를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한국 선교사들의 역사를 읽으면서 가장 은혜를 받았던 것이 있습니다.
황해도 소래에서 조선 사람과 함께 똑같이 입고 먹으며 전도하다가 교회를 건축하고 1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맥킨지 선교사를 보면서 말입니다.
부산에 있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는 한국에 들어와 6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합니다. 공주를 거쳐 추풍령을 넘어 1,500리 길을 달려간 그는 한마디의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하루 만에 천연두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맥킨지의 죽음으로 캐나다 장로교회는 정식으로 조선에 대한 선교를 결의하고 100명이 넘는 선교사를 보냅니다.
데이비스의 죽음이 호주에 알려지며 호주에서 역시 1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찾아오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을 만들어 결핵 퇴치에 앞장선 셔우드 홀은, 의료선교사로 들어왔던 아버지 제임스 홀과 어머니 로제타 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 제임스 홀은 청일전쟁 당시 평양에서 전염병에 걸린 조선인을 돌보다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은 그의 부인 메리언 홀과 함께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살아가며 결핵 퇴치를 위해 평생을 헌신합니다.

‘좋은 것’이 무엇인가요?
사실은 아직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고 찾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의문의 열쇠는 본문 11절에 가서 풀려갑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알렉 모티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면, 나는 절대 다시는 기도하지 않겠다. 하나님께 뭔가를 구하려는 나 자신의 지혜에 대해 충분히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하나님의 기도에 대한 약속이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구하는 때에, 그리고 우리가 구하는 바로 그 조건으로 주기로 서약하시는 것이라면, 연약한 인간의 지혜에 견딜 수 없는 짐을 부과하는 셈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 짐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자녀에게 좋은 것만을 주십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이 생선을 구하는데 뱀을 주겠습니까?
어떤 부모가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부모보다도 선하고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자식이 돌이나 뱀을 구한다면 어떡해야겠습니까? 선한 부모라면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지난 7월 직원들과 함께 제주도에 가서 쉬는 동안 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체험했습니다.
저녁에 간식을 받으러 가던 여자 청년 직원이 뱀에게 물렸습니다. 뭔가에 물려 아프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같이 있던 사람이 뱀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응급차를 불러 타고 병원에 갔습니다.
다행히 뱀의 이빨이 하나는 엄지발톱에 물려 독이 덜 들어갔지만, 한 달 동안을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제주도의 살모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좋은 것을 구한다면….”
그리고 하나님만이 가장 정확하게 우리가 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악한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자식을 키워본 부모님이라면 후회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면 좋은 부모일지 알았는데, 그것 때문에 자식이 잘못되는 것을 보지 않았나요? 절대적인 지혜가 없다면 ‘선’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이 한층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그것을 구별하셔서 우리에게 선한 것으로 채우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응답하지 않으신 것에 대한 감사가 병존합니다. 응답하지 않으심이 거절이 아니라 선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어쩌다가 우연히 그분께 구하는 것을 기꺼이 모두 행하지 않으시는 것을 감사한다. … 나는 하나님이 내가 구하는 특정한 것들을 주지 않으신 것, 그리고 내 앞에서 특정한 문들을 닫으신 것에 대해 진실로 감사를 드린다.”라고 말합니다.

‘좋은 것’의 헬라어는 ‘선한 것’, ‘알맞은 것’, ‘최상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것을 주십니다. 내게 꼭 알맞은 것을 주십니다. 최상의 것을 주십니다.

로이드 더글러스 목사의 소설 가운데 [갈릴리 큰 어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형 선도를 받습니다. 로마의 관리인 멘시우스가 베드로에게 “나도 당신을 위해 많이 기도했으나 결과가 이렇게 되었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기도는 분명히 응답되었소. 나는 이제 죽음이 무섭지 않소.”


하나님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바라봄의 대상이다!
본문 11절을 다시 한 번 봉독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선한 것을 주십니다. 단지, 우리가 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기 때문에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잘못되었는지 아닌지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하는 것의 응답을 자주 경험하다 보면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믿음이 성숙되어지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흥정이 아니라 순전한 신앙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가게 될 것입니다. 
로이드 존 오길비의 [치유]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에 노출됨으로써 뿌려지고 성장하는 씨앗입니다.
치유를 갈망하면서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은 믿음이 필요해!”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리스도께 드러내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주님을 만날 때, 우리 안에 믿음이 생겨납니다. 절대 더 많은 믿음을 구하지 마십시오. 그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구하십시오.
언젠가 D. L. 무디는 자신이 오랫동안 더 많은 믿음을 위해서 기도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언젠가 번갯불처럼 내리칠 믿음을 구했다. 그러나 믿음은 그렇게 오는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로마서 10장을 읽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때까지 나는 성경을 덮고서 믿음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다. 이제 나는 성경을 열고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믿음은 성장을 거듭했다.”
요점은, 우리가 삶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 치유를 갈망할 경우에 믿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는 것은 전혀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자신과 나누는 대화가 기도로 바뀌고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 권위가 더없이 필요하다고 고백할 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흥정하지 마라. 솔직하게 말씀드려라. 필요한 것을 구하여라. 우리는 쫓고 쫓기는 게임이나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간구할 뿐입니다.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언젠가 제가 설교했던 내용인데, 정말 서럽게 바보같이 살아간 청년 바보 의사 ‘안수현’의 이야기 말입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만은 살려주실 줄 알았다고,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렇게 빨리 데려가실 수 있느냐고?”
그의 글을 모은 [그 청년 바보의사, 그가 사랑한 것들]에 제 추천사가 실려 책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고민했던 이야기가 작은 감동을 줍니다.
"우리의 싸움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다. 안 해도 되고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을 문제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인해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말 것인가의 싸움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 써내려가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오래전에 읽었던 A. W. 토저의 책 [이것이 성공이다]에 참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흥정하지 말라
하나님을 상대로 흥정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손에 연필을 들고 계산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복을 주신다면, 제가 얼마를 헌금으로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 좀 더 편하게 살겠다는 얄팍한 계산에 능한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상대로 흥정을 하려고 애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여, 저는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너무 큰 대가를 내는 것은 싫습니다.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의논하고 싶습니다.”라고 기도한다.
당신이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를 놓고 너와 의논할 수 없다. 내 법은 변할 수 없다. 내 뜻은 이미 성경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 이런 문제는 의논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내 뜻을 따르라. 그러면 복을 받을 것이다. 만일 네 뜻대로 산다면 너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유치원생 수준의 이해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구원의 목적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심지어 행복해지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자처하는 책들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구원의 목적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거꾸로 된 가치관을 바로잡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를 낮추어 티끌 중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낮출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높이신다. 그러므로 낮아져서 티끌 중에 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이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가정과 배우자와 부모와 심지어 자기의 생명도 버려야 한다. (마 19:29; 눅 14:26)
우리는 “오, 하나님! 하나님과 가정에서, 아내(남편)와 하나님 사이에서, 부모와 하나님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저는 하나님을 택하겠나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높이는 자들에게 풍성한 영적 만족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이 약속에 따라 역사상 많은 성도가 풍성한 영적 만족을 누렸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성공이다. 이런 성공을 체험하는 자들은 자연 속에서 온전히 만족할 수 있고, 성장과 결실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서 유용한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황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우리 자신을 낮출 때 이런 것이 주어진다. 당신은 진심으로 “나의 하나님! 나보다 높아지소서. 저를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이 높아지소서. 오, 하나님! 제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만 높아지소서.”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넘어짐과 필요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새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달음박질하다 넘어질 때, 땅을 바라보며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독수리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작은 새들이 자신의 날갯짓을 하며 날아갈 때, 큰 폭풍과 기류를 타고 올라가는 멋진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북이를 좋아하는 것은, 우직함 때문입니다. 거북이는 빠르지는 않지만,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려갑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는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룰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왜 거북이가 육지에서 토끼와 경주해야 하나요?
만일 바다에서 경주했더라면 거북이는 결코 느린 동물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거북이는 육지에서 느리지만, 묵묵히 한 걸음씩 정진합니다.

조셉 M. 마셜이 쓴 [그래도 계속가라]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강하다는 것은 네가 아무리 지쳐 있더라도 산꼭대기를 향해 한걸음 더 내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통해하면서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을 뜻하고, 사방이 캄캄한 절망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뜻이다.
또한, 다시 한 번 심장이 고동치기를, 다시 한 번 태양이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희망에 매달린다는 뜻이기도 하지.
한 걸음 한 걸음이야말로 너를 산꼭대기로, 다음 해돋이의 광명으로, 새로운 나날에 대한 약속으로 좀 더 가까이 데려다 준단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죠.
하나님과 흥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직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이런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함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12절)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대접은 꼭 물건을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격려하고 배려하고 남의 처지를 생각해주는 것도 대접입니다. 그처럼 대접하면 가정도 행복하게 되고, 교회도 행복하게 됩니다. 부부가 서로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면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부부 싸움은 큰 문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서 이해하고 배려하고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면 부부 싸움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일 저녁이면 너무 피곤해서 잠이 더 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와 아이들이 안마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은근히 힘든 표시를 합니다. 그런데도 안마를 해주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섭섭한 마음이 생기고, 그런 마음이 있으면 말도 퉁명스럽게 나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대접받으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왜 아내에게 즐거운 미소가 없을까요? 아내에게도 속상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남편이 오기 전에 자녀를 야단치고 자녀와 한참 씨름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내도 남편이 “여보! 오늘 수고했죠?”라고 말 한마디 해주길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내 수고를 알아 달라!”라고 하지 말고 먼저 남의 수고를 알아줘야 합니다. 먼저 대접해야 합니다. 먼저 칭찬해 주고, 먼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안마를 받고 싶으면 먼저 안마해 주어야 합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먼저 해주십시오. 그것이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 황금률이고, 기도 응답을 이끌어내는 왕도입니다.
성도는 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십시오!
구하지 않아도 최선의 것을 주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누군가 당신에게 구하지 않아도 최선의 것을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