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ㆍ선교사후보생모집

세계선교신학

바로가기

설교게시판

상세보기

왜 두려워하십니까?/ 막4:35-41/ 최영 목사/ 2015-06-27

2015-06-27|조회 899

왜 두려워하십니까?

4:35-41

 

 

 

몇 년 전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유머 가운데 <무서워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이 얘기를 듣고 웃지 못하면 알아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살아가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 무서울 때를 무섭나.’라고 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면 무서워 유~.’ 여자들이 남자를 두려워 할 때 무섭군.’ 요즘은 저도 이런 분들이 많은데 무서운 여자와 마주 칠 때를 무서운 걸.’이라고 한답니다. 아직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시면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매일 사건 사고가 많이 나니 하루하루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무섭데이.’

통 털어서 모든 것이 다 무서울 때 무섭다라고 한답니다.

 

메르스(Mers)가 줄어드는가 싶더니 다시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온 국민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두려워하며 무서워할까요? 모두가 알듯이 이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해서일까요?

 

이기지 못해서 갖게 되는 두려움과 알지 못해서 갔게 되는 두려움 중에 어느 편이 더 클까요? 우리가 병들면 병원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진단을 해 보니 아는 병이고 치료의 방법도 아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많이 반감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병명도, 치료 방법도 알지 못하는 진단이 나오면 그 때부터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질병 중에 가장 무서운 질병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할 때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메르스가 두려운 것은 예방할 백신도 없고, 근원적인 치료 방법도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자신도 모르고, 이미 내 안에 있는지, 혹은 내 곁에 어떤 이가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지 못하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두렵습니다.

 

우리의 장래의 일도 알기만 하면, 오늘 나의 형편과 환경이 어떠하던지 두려움이나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정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 처하게 될 때 그 환경의 낯설음에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비록 광야가 많은 땅이지만, 그 마른 땅을 밟고 양과 염소를 치며 살아가던 유목민들입니다.

 

두로나 시돈 사람들처럼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위에 배를 띄우고 살던 해양민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다는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대상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바람이 일어서 하얀 거품을 내품으며 집어삼킬 듯 파도가 쳐대고 한번 빠지면 결코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은 그 깊고 검푸른 바다는 그 자체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두려움과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그 당시 유대인을 비롯한 모든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개념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바다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신화에 의하면 바다에 살고 있는 괴물, 즉 바다의 신의 이름은 티아맛’(우리는 용왕님, 그리스 신화에는 포세이돈)으로서 성경에서는 용 또는 리워야단, 악어, 라합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어둠과 혼돈의 용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티아맛은 바다의 지배자입니다. 그는 파도가 흉용하게 뛰놀게 하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 배를 타게 되면 배를 부수고, 물 속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서 죽게 만드는 그런 두려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다는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람을 잡아 죽이는 괴물이 살고 있는 곳 세상의 두려움, 공포, 혼돈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다는 마른 땅을 밟고 양과 염소를 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던 유대인들에게도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는 막강한 힘이 있는 대상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강하고, 무섭고, 두려운 혼돈의 바다를 정복하고 징계하는 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홍해의 검푸른 바닷물에 바로와 그 군대가 몰살하는 아수라장이 된 바다를 유대인들은 건너편 언덕에서 똑똑히 지켜보며, 바다를 정복하시고 움직이신 분은 그들의 하나님이셨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14:28).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같이 잠겼나이다”(15:10).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은 바다를 발로 밟아서 제압하시는 분으로 세상의 모든 혼돈과 두려움과 공포를 제압하시는 분, 세상의 모든 혼돈과 두려움과 공포를 발로 밟아서 이기신 분이십니다. (3: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요나를 통하여 바다의 생리인 죽음을 정복하시고 승리하여,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의 본문의 질문인 25절의 말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는 오직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기에 바다의 신(Yam)도 순종을 하는가? 하는 질문임과 동시에 이와 같은 일들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에만 가능하다는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여호와(여호와)이시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십니다.

 

(89:9).

주께서 바다의 파도를 다스리시며 그 파도가 일어날 때에 잔잔하게 하시나이다.”

 

(4:41)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결국예수님만이 이 세상에 혼돈과 두려움과 공포를 가져오는 그 두려움의 신을 물리치시고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평강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의 두려움과 공포를 몰아내시고 참된 평안과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 바로 그 분이십니다.

 

구약의 예레미야의 때에 유다 땅 전역에는 심각한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 위하여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리워지고 있었을 때에,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본질적으로 고치지는 않으면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614).

 

진정한 평안은 없는데도 평안을 이야기한 유다 백성들의 예()는 세상의 평안이 거짓된 것임을 잘 말해 줍니다. 세상에 참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환상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이 분명하게 나의 평안, 내 안에서 평안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평안을 주시는 분은 세상의 어떤 명예나 권세나, 물질이나 건강이나, 출세나 성공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오직 평안의 주인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 평안은 자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분이 그 자녀 된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8: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평안을 선물로 받는 사람은 과거에 저지른 죄악의 독으로부터 해방될 뿐만 아니라 현재에 인간의 마음을 썩게 하는 불만의 독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또한 미래에 알 수 없는 것들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지 않습니다.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이룬 신자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에베소서 6:15에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평안의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은 진정 하나님의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한데도, 만일 우리가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에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100%, 확고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그분의 평안의 약속을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안이나 걱정거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내 상황 때문에 생기는 경우는 드뭅니다. 부족한 나의 믿음 때문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린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상대로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상황이, 환경이 그를 전쟁터로 내 몰아간 것이 아니라 양을 칠 때 쫒던 한 마리의 짐승쯤으로 생각하고 개나 이리를 쫓을 때 쓰던 막대기와 돌팔매를 들고 믿음을 가지고 맞섰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분명 우리 모두의 미래는 하나님의 장중에 달려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전도서 9:1절에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하였고,

 

에스라 선지자를 통하여 8:22절에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하나님은 미래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심을 확실하게 믿으시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의지하십시다.

 

결론

 

예수님과 함께 배에 있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평안히 갈릴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정답입니다.

 

최영 목사(횃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