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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의 삶,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2008-06-07|조회 96

헌신의 삶,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목회와 신학>
이경준 목사 vs 박정식 목사

 

개척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들을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헌신되게 양육할 것인가가 큰 문제가 된다. 특별히 교회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라는 식의 강조가 아닌 신앙과 연결된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헌신이라고 아는 목회자라면 부담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도들이 대부분인 개척 목회에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 상당히 고민하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속에 어떻게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할 지에 대해 지혜를 모으는 시간을 마련해 봤다. 진행/홍순석 기자?사진/안유선 기자

박정식 : 개척교회에서 교인들의 헌신과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것은 기존 교회에서는 몰라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교인수가 작기 때문에 ‘혹시 교인이 떠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목회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동네에는 지난 6개월 동안 개척교회가 4개나 더 생겼더라구요, 저도 작은 교회 목사이지만 염려가 되더군요, 어디서 이런 목회자들이 쏟아져 나오는가? 이것은 한국교회의 구조적 문제입니다. 일단 그러다보니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제약을 받고 운신의 폭이 좁고…. 처음에는 바른 목회철학을 갖고 성경적인 교회관을 가지고 하려던 사람도 이런 현장의 문제에 대해 바르게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경준 : 저는 선교단체에 20년 있으면서 제자훈련을 해왔어요. 선교단체의 특성은 요구하는 훈련프로그램을 수행하지 못하면 탈락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자연히 엘리트층, 전달할 수 있는 능력, 지적인 사람밖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같은 경우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다보니까 선교단체가 주는 질적인 공급을 해주지 못하는 현실이 있더라구요. 평준화하게 되면 질적으로 향상되기보다 하향 평준화되지 않습니까! 저의 경우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갔는데 보통, 주일에는 어떤 사람이라도 수용하는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은 주중에 양육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에는 얼마든지 은혜받을 수 있는 예배 형태로 가고, 수요일 저녁에는 제자훈련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들이 결국 주일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도록 인도했습니다.
그 다음에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인데, 워낙 교회들이 많기 때문에 아예 우리교회는 특수화 시키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도라면 개척교회가 양육하기에 더 쉬울 수도 있다고 봅니다. 기존 교회는 틀을 깨는데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제자훈련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개척교회는 헌신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94년도에 개척을 시작했는데, 주일 오전 11시부터 12시 반까지는 예배드리고 그 다음에는 전교인 주일학교를 합니다. 자연스럽게 어떤 의미에서는 선교단체보다 전인적인 헌신을 더욱 요구하는 교회를 해왔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개척교회가 기존교회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는 긍정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삶과 신앙의 분리를 극복하려면
박정식 : 저는 처음에 교회를 개척하는 동기가 삶과 신앙이 일치되지 못하고 말씀과 신앙이 일치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에 대해서 요구하였습니다. 저희 교인들은 그것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기는 했지만,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하는 노력을 하더라구요. ‘가전 제품 하나를 사더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연결해봐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도 그 물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드릴 수 있지않는가’ 라고 가르쳤는데, 그 결과 몇 년 동안 교인들이 냉장고나 TV를 바꾸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희 집 냉장고가 바뀌는 일이 있었어요, 200ℓ 짜리를 쓰다가 430ℓ로 바뀌게 되었어요. 그때 3층이 교회고 4층이 사택이었는데, 사택이 교육관도 되고 성가대 연습실도 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구분이 안되던 시절이었는데, 성도들이 돈을 모아 가지고 저희 사택의 냉장고를 바꾸어 주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교인들이 자기들이 가전제품을 바꾸기 전에 전략적으로 저희 집의 것을 먼저 바꾸려는 것이었어요(웃음). 그래도 몇 년 동안 참고 수고하고 해보려고 노력한 것이 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경준 : 이제는 헌신의 차원이 삶의 문제와 문화에 대한 부분까지도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일하는제자들」에서처럼 여름에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추석을 어떻게 보내야 되는가, 고스톱은 해야 되나, 크리스천은 무엇을 가지고 놀아야 하는가 이런 세부적인 것까지 교회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그런 부분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것은 헌신보다는 교회성장에 더 강박 관념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만 먼저 교회를 개척하거나 목회를 하기 전에 점검해 봐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주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으면 좋겠고, 둘째는 자기 은사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좋겠습니다. 신학교 나왔다고 목회가 다 은사가 아닙니다. 신학교 다니는 중에 목회가 은사가 아니면 그만 두어야 합니다. QT를 통해 은혜를 받는다든지, 전도를 잘 할 수 있다든지 그런 사람이 신학교에 가야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도한 사람 중에 직접 제자훈련한 사람이 있는지, 그런 세 가지를 제대로 하던 사람이 신학교를 가야 됩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신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고 양육해야죠. 거기에서 자기 열매들이 생길 때, 그리고 나서 그들을 데리고 교회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자기가 양육하는 사람들이 비록 몇 가정 안되더라도 그 분들과 같이 자기 집에서 시작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늘어나게 되면 그 때, 건물을 얻으면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개척을 이야기하면 처음부터 빌딩 얻고 건물 인테리어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건물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곧 재정적인 압박이 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헌금을 모을 것이냐, 성도를 모을 것이냐’에 몰두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은 목양의 대상인 성도들의 삶의 변화나 헌신등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성도들의 삶의 문제도 이런 것에서 오는 병폐 같아요.




진정한 헌신에 대해서
박정식 : 진정한 헌신은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삶의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고백과 확신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것이 가장 귀중하다는 변화가 없이는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성도들의 헌신은 문제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영역에서 헌신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하는 헌신의 능력과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는 거죠. 삶의 전영역에서 헌신된 한 사람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바로 그것이 고민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헌신, 주일의 예배당에서 이루어지는 헌신이 아니라 -그것도 한 부분이지만-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를 갖고 드릴 때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저희교회 전도팀과 함께 해남 흑일도와 마삭도라는 섬에 전도여행을 갔다왔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제게 임재하시며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섬에서 복음을 전하고 이동하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그 속에서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찬송을 부르면서 우리 인생이 하룻밤 잠자고 깨워 떠나는 것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가치 없는 삶을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너무나 충만하게 도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내 모든 것이 되시고, 내 모든 소망이 되신다고 하는 결단을 새롭게 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동기가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유발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헌신이 일어나는 것이지 목회자가 원리적 차원에서 요구하고 설교시간을 통해 요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안됩니다. 물론 어떤 과정이나 방편이 있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에 사로잡히면서 내가 소유한 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체험하고 바뀌지 않으면 헌신이 안된다고 봅니다.

이경준 : 기본적인 것은 구원의 감격하고 부활의 소망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 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세상에서 주는 가치관과 그리스도안에서의 가치관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헌신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 무엇이냐를 따져 봐야겠지요. 예를 들어 어떤 투자를 한다면, 투자해서 남는 쪽으로 하게 되거든요, 헌신이란 것이 결국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인데 영원한 게 무엇인지 교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헌신이 결국 영원한 것에 대해 시간을 투자하고 나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헌신하면 신학교 가는 것 선교사 나가는 것, 교회나 선교단체가 요구하는 것에 100퍼센트 순종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로마서 12장 1절에도 있는 것처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헌신이라고 봅니다.
저도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을 마치고 캠퍼스에서 전도할 때, 많은 분들이 제게 질문한 것이 ‘처음부터 신학교가지 그러냐’고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컴퍼스에서 복음전하는 것도 헌신이지요. 물론 일반직장에서 생활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도 헌신인 것입니다.

헌신의 대가들
박정식 : 이런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참된 삶을 요구하다보니까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그 삶의 대가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충분히 공감이 되고 이해가 됩니다. 내가 이렇게 까지 요구하고 저들이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최근에 저희 교회 어느 집사님이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며 바르게 하다보니까 이 세상의 구조 속에서는 어쩔 수 없어서 사업을 그만 두려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물론 헌신하시는 과정이지만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이 세상에서의 아픔과 인간적인 손해를 보게 될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주님의 위로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럴 때, 교회 공동체가 함께 붙들어주고 이렇게 세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한국교회 성도들의 허구를 깨트려야 하는데 ‘내가 이렇게 헌신하면 하나님이 복주실 것이다’라는 생각말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렇게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아도 주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가운데는 지금도 물질과 의식주에서 성경이 보장하지 않는 것에 대한 허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극복해야지요.

이경준 :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인데, 그 복을 단순히 물질과 동일한 것으로 연결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봅니다.

박정식 : 사실 성경을 보면 그것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지요. 바울사도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 것처럼 말이지요. 그럼 성도들 사이에 ‘내가 헌신했는데 내게 돌아온 것이 뭐냐’ 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히브리서 11장이 이야기하듯이 물질적인 복의 측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도 채워주신다는 것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봅니다.

지혜로운 헌신
이경준 : 저는 여기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교회가 헌신을 가르치면서 또 하나 해야 될 것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지혜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력을 갖출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저는 대학교 2학년 때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그 때부터 전도, 성경공부 인도 등으로 너무 바뻤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갑자기 좋아지거나 시간이 늘어나거나 하지는 않는 것 아닙니까? 돌이켜 볼 때 그런 상황에서는 시간 사용의 지혜를 가르쳐 주었으면 참 좋았겠다고 생각됩니다. 사회생활에서 헌신하는 사람의 경우는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나오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로서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자 하는 헌신도 있지만, 사회성 부족으로 인해 핍박받는 것도 적지 않게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성품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들하고 똑같은 한 주일에 168시간 주어져 있잖아요. 헌신하면서 그들을 인도하고 영향력 미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실력을 쌓을 것인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는대로 하면서도 그들을 맞상대할 수 있는 사회성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될 때 신앙과 삶이 따로 가는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주일과 더불어 한 주간에 어떻게 삶 가운데 헌신될 수 있는 지, 그 노하우를 가르쳐 주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하지 않으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회성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를 좇으라 했습니다. 우리는 ‘화평과 거룩’ 중 한가지만 갈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거든요. 세상과 화평하면 신앙을 버리는 것이고, 거룩을 따라가면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야 한다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같이 ‘좇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을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죄가 하나도 없지만 죄인들이 주변에 모여 들으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깨닫고 제 삶의 모토가 바뀌었어요.
대인관계를 잘할 수 있는 사회성, 성품을 가르치는 것이 실제적인 헌신을 가르치는 것이 바른 것 같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인 교회에서 보면 세상과의 구별된 삶을 살라고 가르치면서 ‘어떻게’는 가르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가르칠 때 온전한 헌신의 모습이 회복되지 않나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