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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준비하시오”

2008-06-07|조회 87
교회도 <연령 콤플렉스>에 걸리고 있는가?


목회 현장의 요구가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목사’ 하면 의례 나이 지긋하고 경륜이 깊은 인물을 떠올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목회자 상이 변하고 있다. 교인들은 보다 젊고 박력 있고 활력이 충만한 그런 목회자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50대 말이나 60대 이후의 목회자들은 은퇴연령이 되기 전 이미 은퇴를 강요당하는 듯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연령 콤플렉스가 만연하더니 이제 교회까지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깊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근본에는 구태의연한 목회에 대한 염증과 반발이 존재한다. 다만 나이가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교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그런 목회자를 원하고 있는 마당에 그 소리가 그 소리인 식으로 교회 분위기가 이루어지면 자연 목회자 교체 요구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내놓고 할 수 없어, 교회마다 고육지책으로 목회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안식년을 통해 교체 대상 목회자의 영향력을 줄이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새로운 목회자 후보 선보기를 하는 것이다. 기존의 담임 목회자로서는 자신의 거취와 관련하여 위협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오랜 목회생활에 지친 노령의 목회자들이 안식년이나 설교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부담이 줄어 좋은 듯 하나, 이러한 저의와 배경이 있기에 사태가 결코 반갑지 않다. 그렇다고 또한 이들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여기에 반발하거나 문제를 삼을 도리도 없다. 서로가 엉거주춤 한 상태에서 불안한 공존과 긴장이 지속되는 것이다. 교인들은 교회 개혁 내지는 교회 분위기 쇄신 또는 변화하는 목회현장의 요구를 신속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교체 대상이 되는 목회자로서는 자신의 목회에 대한 깊은 좌절과 배신을 느끼고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 양자 사이의 중간지대는 없는 것일까?

한국교회의 목회자 상은 시대마다 달라져온 것이 사실이다. 과거, 부흥회 스타일의 목회자 상이 대세를 이루었던 때가 있었다. 전도의 열정이 뜨거웠던 때, 연예인과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려야 교회 성장이 되는 것으로 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타일이 교인들의 교육적 배경과 문화적 수준이 달라지면서 퇴물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이들은 마치 유랑극단의 배우처럼 등장했다가 명멸해버리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좀더 진지하고 깊이 있는 성서 해설자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는 교육수준을 따지지 않았던 교인들은 학력 콤플렉스에 걸린 모양으로 학위가 있는 목회자를 우대하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서 무수한 가짜 박사학위 소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일부 목회자 자신들도 학위 콤플렉스로 시달리면서 엉터리 학위라도 걸쳐야 행세를 하는 줄 알게 되었고, 자신과 교인들을 속이는 이중성의 덫에 걸렸다.

그러나 스타일이라든가, 학위라든가 하는 것들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사태가 급기야 벌어졌다. 연령은 어쩌는 수가 없는 것이었다. 교회의 권위주의적 풍토가 견고하면 그나마 버티겠지만 그것도 이제는 서서히 허물어져가고 있고, 그런 가운데 연령이 높은 것이 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일반사회에서는 이미 시작되어 왔던 것이고, 이른바 명퇴 물갈이 판이 벌어지면서 교인들은 너무도 익숙하게 경험하고 있던 바였다.

회사에서 40대 중반에 이르면 벌써 ‘짤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한참 생산력이 높은 때에, 물러나야 하는 이른바 고려장이 사회적 풍조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실력 있고, 활력 넘치고 값싸고 고분고분한 젊은 세대가 널려 있는 판국에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구렁이를 닮아 가는 중년이 설자리는 점점 더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수명은 늘어만 가는데, 현실에서 4-50은 벌써 할아버지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주름살을 없애랴, 머리를 염색하랴, 애들 노래를 따라 배우랴, 나이에 걸 맞는 품격과 분위기를 성숙하게 기르기보다는 연성전략을 취해야 생존하는 사회에서 나이는 거추장스럽게 되고 있다. 그뿐인가? 자기 보다 나이 젊은 사장이나 회장이 여기 저기서 등장하고 있는 판에 이제 나이를 들추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워지고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이다. 과거에는 한 두 살 가지고 서로 따지고 서열을 매기는 위계질서가 있었지만, 이제는 너나 할 것 없이 젊어 보인다, 어려 보인다가 칭찬이 되고 있다. 노숙하다는 것은 너 늙었다 소리를 듣기 좋게 하느라고 하는 형편이 되었다. 늙었다는 것은 미래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과 동일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할 교회에마저 파고들어 나이든 목회자를 하나씩 내어쫓고 있다. <고려장>이 교회에서도 기승을 발휘할 기세인 것이다.

“당신 이제 은퇴 준비하시오” 하는 소리를 듣고 좋아 할 사람은 은퇴이후의 생활이 확실히 보장된 사람 빼고는 아무도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이 평생을 몸담아 온 교회 강단에서 축출되면 그들은 졸지에 거리에 나앉는 인생이 된다. 물론 경제적으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집 없는 천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교인들의 고민도 만만치 않다. 공부하지 않는 목사, 몇 년 동안 대충 자신의 설교 노트를 구태의연하게 우려먹는 목사, 변화에 민감하지 않아 지루한 목사, 교인들보다 문화적, 교육적 수준이 되지 못하는 목사, 목사가 나이 들어 청년들이 잘 모이지 않는 교회, 등등은 교인들에게 딜레마이다.

그 목회자와 함께 성장해온 교인들조차 이제는 다른 밥을 먹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일고, 그 밥을 목회자가 마련해주기 무망하면 결국 교인들은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른바 교회 강단의 구조조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구조조정이 안식년을 빌어서이건, 또는 설교전담이라는 명분을 통해서이건 새로운 유형의 목회자 찾기로 압축되는 것은 당연해진다.

아무개 목사는 요즈음 깊은 실의에 빠져 있다. 개척 교회의 어려움을 딛고 교회성장에 주력해온 지 이제 20년, 그만 하면 별로 주눅들지 않는 교세가 되었다. 그러나 최근 교회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동안 수고한 것에 대한 보답인 줄로만 알았다. 20년 동안 안식년 한번 없이 지내온 자신에게 미국에 한 일년 갔다오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표정이 좀 기묘했다. 의구심이 든 그는 자세히 사정을 이렇게 저렇게 알아본 결과, 장로들이 모여 의논한 소리들이 조금씩 들려왔다. “우리 목사님 스타일로는 청년들이 모일 수가 없어. 이래 가지고서는 결국 늙은이들만 모이는 교회가 되고 말겠어. 우리 애들도 자꾸 이 교회를 떠나려고 해. 설교가 지루하다는 것이야.”

교인들이 자기가 싫어졌다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심중은 더욱 깊은 곳에서 아파하고 있었다. 자신의 진지함 하나면 모두가 공감하고 따라주겠거니 했던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고통이었다. 유행처럼 지나가는 ‘반짝 목회 스타일’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장로들이 어느새 그 물이 들어 자기를 보는 눈이 달라진 것이었다. 자기는 이제 더 이상 먹히지 못하는 목사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하나? 당장 생활이 걱정이다. 그리고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쫓겨 난 목사로 알려지면 시골에 가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같은 교회의 아무개 장로는 그와 또 다른 고민을 한다. 아무개 목사와는 비슷한 연령으로 지난 세월을 동고동락해왔다. 그러나 목사의 스타일이 영 구식인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다. 회사의 고급 간부인 그는 기업주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남았지만 그가 보기에도 요즈음 젊은이들의 통통 튀는 느낌은 자신의 세대감각으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고, 또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자기도 냄새나는 ‘노땅’이 되지 않으려고 무진 기를 쓰는데, 목사는 그걸 우습게 본다. 몇 번 충고했지만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는 눈치가 아니다. 그는 목사가 시대 상황에 적응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정말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그러나, 그를 어떻게 내치나? 누구를 생각하면 누가 울고, 누구를 생각하면 또 다른 누가 운다 식이다. 교회는 교체를 원한다. 그러나 교체의 과정이 자칫 잔혹하다.

이 경우를 봐도, 결국 밀고 밀리는, 또는 저항하는 식의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로서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성싶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두 가지 대안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기존 목회자들에 대한 재교육 시스템을 보다 활력 있게 추진하는 것이다. 시대적 상황변화에 따른 교인들의 요구와 목회적 책임을 조화시키는 문제를 놓고 보다 심층적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훈련시켜나가는 노력이 절실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교인과 목회자 상호간의 이해를 넓히고 새로운 목회 전략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둘째, 새로운 세대에 속하는 부교역자들의 활동공간을 보다 확대하는 것이다. 자칫 담임 목회자들은 부교역자들을 견제하거나 그들의 활동공간을 감독만 하려드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들과 팀 목회를 이루면서 새로운 교회의 유형을 끊임없이 창조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에 실패하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담임 목회자에게 오게 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최근 나이든 목회자에 대한 은퇴압박은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보다 근본은, 교회가 연령 콤플렉스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교회로서 심각하게 재검토 해봐야 할 대목이다. 나이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능력이 기준이 될 때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정신적 지도력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에서, 목회 스타일의 유행을 쫓는 것은 금물일 것이다. 이점을 간과하게 될 경우, 그 교회는 경박한 목회의 길로 가게 될 수 있다. 온통 재미와 새로운 변화만 추구하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견고하고 묵직한 중심을 세우는 교회 그것이 우리가 바래야 할 바일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오늘날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려장을 쫓아 능력 있고 진실한 목회자들을 생매장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한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