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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는 암호해독문이 있습니까?

2008-06-07|조회 91
8월 15일은 독립일이자, 광복의 날이다. 그러나 같은 8.15라도 일본인에게는 종전의 날이자 패전의 날이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8월 15일은 동일한 날이고, 여느 날처럼 24시간이고 그것도 그리니치천문대에서 계산한 동경 135도의 똑같은 시간임에도 우리에겐 기쁨의 날, 저들에겐 치욕의 날,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 날을 맞는 양측의 역사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식민제국주의국가로서, 우리는 피식민지국가로서 지나온 역사의 기억 속에 담긴 내용이 다르고 틀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문화를 삶의 방식과 가치관의 총체라고 폭넓게 이해한다면, 이 ‘다름’ 을 ‘문화의 차이’ 라고 부를 수 있다. ‘문화가 정보’ 라는 현대문명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다름’ 은 사실 코드가 다르다는 말이다. 정보를 암호화(인코딩)하는 코드가 다르기에 해독(디코딩)한 후 의미가 변환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감격스러운 해방
-문화적 코드에 따라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달라진다


여러분은 8. 15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리 아버지는 해방되던 날의 감격적인 방송이 떠오르고, 우리 어머니는 정신대로 끌려간 이웃 언니가 생각나고, 나는 그저 특별한 감정도 없이 1945년이라는 연도만이 먼저 떠오르는데, 내 조카는 콜라가 생각나고, 내 아들은 대문에 달 태극기가 생각난단다. 이처럼 같은 단어도 코드화하는 과정, 즉 각자의 삶에서 얻어지는 경험의 차이 때문에 느낌이 다른 것이다.

하나 더. 누가 “샌프란시스코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 곳은 미국의 삼대 미항 중 하나이고, 금문교가 있는 도시이며, 세계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있고, 동성애자가 많고, 그래서인지 89년에 대지진이 일어났던 곳 등등.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 대해 약간이라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분이라면 성 프란시스코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인명이 되면 그 멋진 구도자의 존경하는 이름 때문에 흠모의 마음이 절로 생기는데 반해, 지명이 되면 다른 의미로 바뀌곤 한다. 이런 의미의 역전은 참 많기도 하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좋은 용어나 그 의미들이 이런 ‘다름’ 으로 인해 퇴색되기도 하고 피하고 싶은 말로 변하는 예를 종종 만날 수 있다. ‘마라나타’, ‘베뢰아’, ‘여호와의 증인’ 이란 말 등은 이단들이 사용한 후로 쓰기 거북해진 말이다. ‘가나안’ 하면 제과점이 떠오르고, ‘할렐루야’ 하면 이상한 기도원이 떠오르는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할렐루야’ 라는 기사식당도 있다.

우리 동네엔 ‘브니엘’ 이라는 카센타가 있다. 그곳에 가면 ‘야곱의 하나님’ 도 만날 것 같다. 약간 뉘앙스가 다르긴 하지만, ‘요단강’은 세례 요한이 예수께 세례를 베풀던 장소로서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며칠 후 며칠 후...”하는 찬송가와 함께 진행되는 장례식이나 추도예배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이미지의 합성은 문화가 가진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한 예에 불과하다. 교회에서 문화 논의가 헷갈리는 이유는 바로 이런 디코딩의 한계 즉 표준 코드의 부재라 할 수 있다.


문화를 읽는다 - 유용한 잣대들

그러므로 종종 문화를 ‘읽는다’ 는 말은 참 적절한 표현일 수 있다. 문화는 많은 정보를 기록하여 저장해둔 매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기록매체는 종이에 쓰고 인쇄하는 게 대부분이어서 문맹 퇴치가 바로 문화를 이해시키고 읽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에서는 기록매체가 변해서 영상이나 음성장치는 물론이고 컴퓨터를 이용한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 자기디스크들이 사용된다.

이를 읽기 위해서는 당연히 컴퓨터의 프로그램과 기계적인 출력장치가 필요하다. 그 결과 새로운 정보는 새로운 기록매체의 능숙한 이용여부에 따라 그 정보의 읽기가 가능해졌다. 소위 컴맹이 문맹일 수도 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우선 문화가 가진 이중성에 주목해야 한다. 시각에 따라 문화는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긍정과 부정을 좋고 나쁨으로 본다면 ‘좋은 문화, 나쁜 문화’ 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무엇을 근거로 해서 좋은 문화, 나쁜 문화를 구분하느냐는 것이다. 몇 년 지난 광고 카피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세상 컴퓨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바꿔주는 컴퓨터와 안 바꿔주는 컴퓨터...” 이것을 문화의 좋고 나쁨을 표현하는 데 사용해 본다면, “이 세상 문화에는 두 가지가 있다. 좋은 문화와 안 좋은 문화...” 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하면 문화를 설명하는게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냐?” 고 누가 물으면, “좋은 문화는 ‘안 나쁜 문화’이고. 나쁜 문화는 ‘안 좋은 문화’ 죠.”라는 대답으로 단순 정의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이는 문화 이해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지나친 단순화로 인한 근원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아무튼 좋고 나쁨의 기준은 다양하다.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사회적으로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 유해하냐 안 하냐’, ‘정신 건강에 좋으냐 나쁘냐’ 하는 식으로 논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의학적인 좋고 나쁨의 차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대중문화, 그것도 음악 얘기로 하자면, ‘록음악이 정신 건강에 좋으냐 나쁘냐’ 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한물 간 얘기이긴 해도 음악 치료학에서 사용하는 “정신질환에는 이런 음악이 좋고 심장병환자에게는 저런 음악이 어떻고, 또 식물에게는 요런 음악이 성장을 돕고...” 하는 식의 기준도 있다.

또 윤리라는 잣대도 있다. 이 잣대는 흔히 대중예술이나 대중문화에 많이 적용된다. 스포츠신문의 선정성, 어떤 가수가 피운 대마초, 이발소에서 행한 퇴폐영업, 여성접대부를 둔 증기탕 등등. 그러한 시비는 꼭 청소년들에게 유해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고 끝난다. 그런데 이런 윤리가 너무 상대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성인에겐 면역이 있어서 확실한 예방이라도 될 것 같은 분위기로는 좋고 나쁜 문화를 가려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경우, 영성의 문제로 가면 이 문화의 갈등 구조가 더더욱 복잡하고 심하다. 누구도 남의 영성을 속단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통성기도 안 하거나, 새벽기도 안 나가면 영성이 없는 것처럼 말하기 좋아한다. 이처럼 자기 경험과 신앙의 이해를 바탕으로 짜 만든 코드로 제멋대로 디코딩하고 있는 게 우리 교회의 문화현실이 아닌가 한다. 당신은 지금 우리 문화의 바른 읽기를 위한 암호문을 가지고 있는가?


신명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