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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김기현

2008-06-07|조회 87
▲그리스도의 십자가
존 스토트 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IVP
관리자
구한말 선교사였던 헐버트는 ‘대한제국 멸망사’에서 “한국사람들은 사회 관습으로는 유교를 따르고, 철학적으로는 불교를 따르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영혼숭배 즉 미신적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삶의 영역에서는 바울이 말한 바, 다른 복음을 좇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일이며, 성서적 삶의 양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증거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세계관이 우리 자신에게 체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 기독교 세계관은 실천이자 순종이다.

영생과 참된 이웃에 관한 예수와 율법사의 변론을 보자.(눅10:25-37) 율법사는 끊임없이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려고 하며, 영생과 이웃에 관한 사변적인 지식을 추구한다. 반면에 예수는 율법사의 앎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그의 위선과 부조리를 드러내신다.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히 드러내주는 말씀이라 본다. 기독교 세계관은 사변적이지 않다. 작금의 세계관 운동이 너무 사변적이진 않은지, 제자훈련이 성경 지식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그분에 대한 순종이며, 그분처럼 실천하는 것이다.


둘째, 세계관은 다양하다.

리차드 니버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세계, 즉 문화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먼저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 있다. 터툴리안과 톨스토이로 대표되는 이 유형은 세계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와 은둔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에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은 복음과 문화를 동일시한다. 역사적으로 자유주의와 근본주의가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는 상호 대립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신들의 세계관을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중산층 이데올로기와 성서의 세계관을 분간하지 못하고 일치시킨다.

나 개인적으로 보기에 창조과학회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다. ‘성서가 과학적이다’ 라는 생각은 성서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과학적 훈련에 의한 것인가? 이 유형은 당시의 지배적인 사고 방식을 성경적인 것으로 혼동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두 유형과 달리 다음의 세 유형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의 적절한 관계를 찾기에 고심하는 유형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유형이다. 이 유형은 두 번째 유형과 같이 문화와 그리스도가 구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화보다 그리스도를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본다. 문화로 환원될 수 없는 그리스도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다음으로는 역설적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 유형으로 루터가 대표적이다. 아퀴나스와 달리 루터는 그리스도와 문화가 종합될 수 없는 갈등을 일으킨다고 본다. 터툴리안적 분리가 아니라 긴장과 역설이 올바른 관계 모형이다.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로 어거스틴과 칼빈의 유형이다.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신념은 이 세계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한다.

지금까지 니버의 다섯 가지 유형을 말한 이유는 기독교 세계관의 유형이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과 특정한 모델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한국교회에는 지나치게 한 가지 모델이 독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다섯 가지 유형이 상호 존중과 견제, 균형있게 존재하는 것이 한국 교회에 보다 유익하고 바람직할 것이다.


셋째, 세계관은 역사적이다.

니버는 가장 바람직한 유형을 변혁 모델이라고 하였다. 그럴 듯 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에 변혁 모델만이 변혁 모델이 아니었으며, 변혁 모델이 보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변혁 모델이 보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소위 고지론과 성공 신학(SUCCESS THEOLOGY)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성공과 출세를 변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의 주장처럼 대학, 언론, 정부를 장악하는 것이 변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변혁적 삶은커녕 도리어 부정과 부패의 전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변혁이 곧 성공이나 고지에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변혁 유형만이 변혁 모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아퀴나스의 종합은 대학과 시장의 발달에 따른 이성의 발달을 승인하고 가톨릭 신앙 안에 종합하려는 노력이었다. 또한 루터의 경우 중세 가톨릭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한 것에 반해서 이원론적인 긴장으로 구분하여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단지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중세를 비판하고 종교 개혁을 이끌어 냈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라고 한 것은 영원할 듯 보였던 로마의 멸망으로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신적 공황과 허무를 신국과 교회를 일치함으로써 극복하였다. 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모델들이 그 시대에 변혁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과 우리 시대의 변혁 모델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따져 보게 한다. 우리 시대의 변혁 모델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세계관은 제자도이다.

(마 16:13-28)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잘 드러내는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지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핵심으로 꼽는데 대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첨부해야 한다.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본문은 주님되심(Lordship)과 제자도(Discipleship)의 압축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제자로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 스토트가, 최근 유행하는 ‘영성’ 이라는 용어를 ‘제자도’라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다.

이 글을 맺으면서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위한 책을 몇 권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기독교 세계관이 실천이며 제자도라는 것을 고려하면서 읽기를 바란다.
첫째는 뭐니 해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이다. 성서 보다 더 좋은 세계관 교재가 있겠는가? 주야로 묵상하길 바란다.
둘째는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홍성사)를 권한다. 기독교 신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에게 참 좋은 고전이다.
다음은 자크 엘룰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대장간)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 참여를 고민하는 이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사람이 엘룰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하고 다원적인 사회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정체성과 선교의 이유를 복음적이면서도 다원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하는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IVP)을 가장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리고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대한기독교서회)를 당신의 책꽂이에 있기를 바란다.

※ 김기현 목사님의 지상강좌는 이번 호를 끝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애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기현 목사 :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침신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부산 수정로침례교회 담임 목사이며 침신대와 경성대에서 종교철학과 현대신학을 강의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Godislove.net/credo)
<새벽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