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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보육원 정성덕 원장

2008-06-19|조회 98
작은 사랑으로 아이들 키웁니다


전남 목포 북항에서 덩그러니 떠있는 배를 탔다. 7∼8분 정도 지났을까, 나무숲만 보이던 건너편 압해도에 어느새 하나 둘씩 얼굴들이 다가온다.
“네, 오셨어요? 그럼, 거기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부지런히 나가겠습니다.”
고즈넉한 선착장에 사람들은 점점이 마을로 들어간다. 그 사이로 작은 키에 검게 그을린 사람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정성덕 원장이다. 그가 몰고 온 흰색 용달차로 우리를 응접한다.
좁은 시골길을 20분쯤 달리자 푸른 들판에 발갛게 내비치는 건물이 보였다. 그가 손짓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보탰다.
“저희 보육원이에요, 이쁘죠? 시골은 다 파랗잖아요. 풀이랑 물밖에 없어서 부러 발갛게 칠했어요. 멀리서 봐도 발간 게 눈에 탁 띄어 좋을 것 같아서요.”

간판에 담긴 사연

“어, 원장님! 표지판이 있네요?”
바닷가 작은 마을이라 이웃 사람 다 알고 동네 속속들이 어디에 뭐가 있는지 꿰고도 남는 판에 표지판 설치는 왠지 유별나 보인다.
“저희 애들 중에 지금 목포에서 간판을 하는 녀석이 있어요. 걔가 매번 올 때마다 맘에 걸렸는지 그놈 하나 만들어 갖고 왔더만요. 방문하는 손님들이나 애들 보러 오는 분들이 불편하실 거 같아 달아놔야 한다면서요. 저희 애들이 그래요.”
작은 간판 ‘신안보육원’ 하나에도 그런 사연이 있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 동서리 808-11번지, 그곳에 신안보육원은 당당하게 제 이름을 내걸고 있다. 돌고 돌아 들어간 보육원에는 온통 나무들로 꽉 차 있다. 잘 가꾼 과수원에 자리한 별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제법 규모가 있어 적잖게 놀랐다. 건물을 감싸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난 잘 닦인 길은 저만치 건물과 연결되어 있어 보육원은 그대로 작은 마을이었다. 나중에 들은 설명이지만, 그 많은 나무들 중 돈 주고 산 것은 하나도 없다. 누가 나무를 버린다 하면 냅다 달려가 용달차에 실어 와 보육원 여기저기에 심어 지금의 큰 숲을 만들어 놓았다.
안내된 사무실에 가방을 내려놓으니 창 너머로 출렁이는 남해 바다 전경이 보인다. 보육원 어디에서든 바깥 풍광이 보이고 원내 구조를 마을과 연결해 설계하였다. 누구나 출입하기 쉽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단다. 원생들 학교 끝날 시간이라 곧 버스 운전하러 가야 한다는 정 원장은 분주하게 보육원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 시골에 살 때 저희는 다들 걸어 다녔어요. 근데 우리 애들은 차로 데려다 주고 데려 와요. 시골이라 학교가 멀어 한참 걸어야 하는데 차가 있으니 애들 힘들지 않게 그렇게 해요. 지나는 동네 애들도 태우고 가니까 마을에서도 좋아해요.”










아침 7시 40분, 등교하는 보육원 아이들 속에 그만한 키의 정 원장이 서 있다.



주차장에 세워 둔 큰 버스가 원생들 등·하교 차량이다. 대형 버스는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코스를 잡고 오전 7시 40분에 학교로 가고, 오후 4시쯤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온다. 입구에 세워진 간판이 그러하듯, 버스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생긴 것이다. 전자 회사에서 물품 구입 후 구입 금액의 일정 비율로 후원금 쿠폰을 발행한 적이 있는데 1년 넘게 목포와 광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쿠폰을 모아 버스를 장만했다. 또 보육원 끝자락에 있는 체육관도 같은 방법으로 기증 받았다. 80명 아이들이 쓰는 공간이니 작은 규모는 아니다. 버스와 체육관을 합해 금액으로 환산하면 1억 원에 족히 이른다. “찾아보면 다 있어요. 애들 공부시키는 것도 힘들지만 찾아보면 다 방법이 있더라고요.”
정 원장은 힘들어도 ‘참고 견디면 좋은 날 온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최선의 환경, 최대의 지원을 위해 자신이 직접 전화를 걸고 사람을 만나며 용달차를 몰고 어디든 찾아다닌다. 그것이 보육원을 지켜 나가는 방법이다.

목포에서 압해도로 둥지를 옮기고

정성덕 원장(47세).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보육원을 들락거렸다. 이야기는 그의 할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작고하신 경북 상주가 고향인 정재현 옹이 1920년대 구례 섬에 거지와 고아들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복지 사업을 시작한 게 신안보육원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에는 아주 심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못살고 가난한 데가 목포였대요. 그래서 거지가 많고 고아도 많아 복지 사업을 시작한 거지요. 저희 할아버지는 신앙이 없었지만, 아버지는 신앙인이라 저도 신앙을 갖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이게 사실은 전라남도에서는 굉장히 오래된 시설입니다.”
아버지 정진태 목포성락교회 장로가 2대 원장을 지냈고 현재 이사로 적을 두고 있다. 보육원 곳곳에 정 장로가 찍은 가슴 뭉클한 원생들 사진이 군데군데 걸려 있다.
목포에서 압해도로 들어온 것은 1989년, 그 해 원장으로 취임하고 13년째이다. 정 장로는 아들의 보육원 경영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어렵사리 결정을 내렸다. 당시에 압해도가 개발이 되지 않았지만 미래 발전 가능성을 예측하고 옮겨왔다. 2005년에 완공을 목표로 목포와 압해도를 잇는 다리 공사가 지금 한창 진행 중이다.
압해도로 들어오기로 결정한 후,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어려움이 많았다. 보육원생들이 들어오면 교육에 문제가 생기고 주민들의 자녀들도 나쁜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목소리에서 힘들었던 지난날들이 묻어 나온다.
“그게 아니에요. 우리 애들이나 마을 애들 모두 더 좋아졌어요. 시골이라 정서적으로 순화되고 순수해졌어요. 사회복지사들이 계속 투입되니까 아이들이 방치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훨씬 더 좋아졌어요.”
사회복지사는 정 원장을 포함해 모두 13명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이름은 ‘엄마’다. 아이들은 복지사 선생님들을 그렇게 부른다. 엄마 한 명이 7∼8명의 아이들을 맡는다. 복지사가 많은 편이라고 하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내젓는다.
“일반 가정과 비교해 보세요. 요즘 엄마 한 명이 많아야 한두 명을 키우잖아요. 그에 비하면 우리는 7 대 1이에요. 수치상으로 엄청나게 차이가 나죠. 일반 엄마들보다 일도 많지 않습니까.”
정 원장에게 내도록 ‘일반 가정’이라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그는 가정집 같은 보육원을 꿈꾼다. 그래서 집단 생활이 아니라 모세반, 야곱반, 요셉반, 마리아반, 에스더반 등 집마다 아이들이랑 엄마들이 함께 산다. 아이들이 생활하는 ‘집’에 가면 저마다 방 앞에는 다양한 사진들과 장식품으로 요란하게 꾸며 놓았다. 3명 정도 방을 같이 쓰는데 언니 동생, 형 동생이 함께 지내도록 하고 있다.
다음 날 아침,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가 여섯살바기 수영이를 세수 시켜 주었다. “동생을 닦아주는 거예요. 얘는 아파서 혼자 머리 못 감아요.” 아이들은 그렇게 오빠와 여동생으로 어우러져 한가족이 되어 자연스럽게 삶을 체득하고 있다.

가족보다 살가운 보육원 식구들








"잘 갔다와," 정 원장은 꼭 안아주며 아이들을 학교로 보낸다.



정성덕 원장에게 아이들은 자신의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다. 365일 중에 하루도 아이들과 떨어져 있지 않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쌍둥이 두 아들과 총무로 보육원을 돌보는 부인과는 떨어져 산 지 오래다. 우랑, 아랑이 모두 고3이라 신경이 많이 쓰일 텐 데도 부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보육원 아이들을 챙기기에 바쁘다.
“그래도 걔들은 복 받은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 다 계시고 엄마도 있는데, 우리 보육원 애들이랑 비교하면 안되죠.”
그는 무녀독남 외아들로 자랐지만 과감히 아들들과 헤어져 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 서울 친척집에서 살았다. 자칫 보육원 아이들이 그를 보고 마음 고생할까 봐 아버지 정 장로가 서울로 보낸 것이다. 외아들이 독차지할 법한 부모님의 사랑과 응석은 남의 일이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을 마치고 직장 생활하기까지 부모님과 살 부대끼며 막역한 외아들로 살아본 기억이 없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 오히려 보육원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원장님 자녀들이 고아 아닌 고아로 살지요. 마음이 짠합니다. 맨날 여기서 우리 애들이랑 먹고 자고 하니까요, 죄송스럽지요.” 한 공간에서 일하는 최은영(26세) 선생의 말이다.
미안하기는 두 아들뿐 아니라 부인 김성(44세) 씨에게도 마찬가지다. 1983년 결혼한 지 1년 만에 목포로 내려와 보육원 일에 매달려 지금까지이니 말이다. 그나마 한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어 마음은 맞닿아 있었는지 부인은 남편을 보고 살포시 웃기만 한다. 그들만의 신뢰요, 속삭임이리라.
“집사람이 저더러 그럽니다. 농촌 총각한테 속아서 결혼했다고. 맞는 말이죠. 결혼하자마자 시골로 내려와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업무상 신안군청에 들르려고 일찍 퇴근하는 김성 씨를 배웅하는 정 원장의 품에는 세살바기 분홍공주 채연이가 “아빠, 아빠”하며 안겨 있다. 그가 보육원을 떠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채연이 같은 아이들의 손을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맨날 뛰어 댕겨요, 우리 원장님은”

정 원장은 돈도 없고 배경도 없어 발로 뛸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공식 직함을 ‘잡부’라고 한다. 마디 굵은 손이 충분히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며 공부시킬 것 등 모든 것을 채우기 위해 다니지 않는 곳이 없다. 언제나 바쁜 그이기에 사회복지사 선생들도, 보육원 아이들도 “우리 원장님은 맨날 뛰어 댕겨요”라고 이구동성이다.
김혜련(27세) 선생은 1997년부터 그를 보아왔다면서 “한결 같은 분”이며 상사라기보다 친근한 어른으로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다고 조심스레 말을 얹는다.












보육원 앞바다에서 바라보는 저녁 노을은 그의유일한 사치이다.



재벌도 아니고 재간도 없어 그저 ‘하나님이 다 해 주신다’는 든든한 믿음 하나로 지금까지 십수 년을 버텨 오고 있다. 그래서 정 원장은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가르치고 함께 교회에서 예배하는 믿음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원생들은 매일 큐티하고 금요일 저녁에 모여 같이 기도하며, 주일 새벽에는 간단히 예배를 드린다. 그것은 어쩌면 정 원장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유일한 유산인지도 모른다.
“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마어마한 숫자인데 하나님이 다 채워주셔서 지금까지 감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우리 애들이 섬에 산다고, 보육원에 산다고 주눅들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항상 이야기해 줍니다.”
여름이나 겨울에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전국을 누비는 것도 용기를 갖고 꿈을 크게 가지라는 그의 소망에서 비롯한다. 부산, 거제도, 제주도, 설악산 등 가능한 많은 지역을 다녔다. 그것은 사치도 만용도 아니다. 두 눈 부릅뜨고 발로 뛰어 다니며 나라와 각 기관의 지원과 혜택을 놓치지 않고 받아서 여행한다.
현재 대학생이 5명이나 돼 교육비만 해도 엄청나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뜻을 정해 학업에 열심이라 장학금도 받고 때마다 하나님께서 후원의 손길도 보내 주시기 때문이다.
호텔 총지배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목포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경환(20세)도 초등학교 때부터 정 원장에게 양육되었다. 쌍둥이 누나 인선, 인숙(21세)도 치위생과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다. 대학 과정은 임시 보호로 가능하다는 그는 일단 입학하면 졸업은 하나님이 시켜 주신다고 꼬리를 단다. 그것은 경험으로 깨달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다.
그가 맘놓고 뛰어다닐 수 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 도움도 크다. 목포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며 근 10년 동안 아이들에게 과자를 대주는 권충룡 씨, 매월 ‘자장면 봉사’하러 오는 중국집 주인 아저씨, 애써 지은 농산물을 애들 먹이라고 가져다 주는 동네 주민들, 10년 넘게 아이들 밥 챙겨 주는 식당 아줌마, 보육원 시설 관리하시는 식당 아줌마의 남편이 바로 그들이다.
“아주 작은 사랑이 아이들을 풍요하게 하는 것 같아요. 작은 것에 감사하니까 사람들이 편안하게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더라고요. 그리고 애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없다고 받을 생각만 말고, 너희에게 있는 것도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여름이면 보육원을 개방해 수련회 장소로 사용하게 합니다. 애들이 좋아해요.”
정 원장은 받는 것에 익숙해질 법한 아이들에게 스스로 베풀 것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아이들의 주눅든 자존감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어미새의 마지막 꿈

아침이면 어김없이 아이들과 등교길에 오르는 정성덕 원장.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 지나가는 마을 아이들까지 태우고 간다. 그는 지금 가진 것 없어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음을 80명의 자녀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신안보육원의 아침을 맞아 큰 둥지를 지켜 나가는 어미새의 날갯짓을 본다. 어린 새들을 먹이고 세상 풍파에서 상하지 않게 품어 마침내 창공을 날 수 있을 때까지 둥지를 지킬 것이다.
새끼들을 키워야 할 모진 현실 앞에서 그는 절대 눈감지 않을 것이다. 두 눈 바로 뜨고 작은 것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두려움을 내어쫓고 분명 비상할 것이다. 신안보육원 둥지가 텅 비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어미새의 마지막 꿈이 속히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주님, 그 꿈 이룰 때까지 그의 날개 상하지 않게 하소서. 그가 분주히 비행하는 동안 주님이 친히 둥지를 보듬어 주소서. 그리고 그 꿈 이루면 곤고한 날개 쓰다듬어 주소서.

빛과 소금
송민희 기자 mini@tyrann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