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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살인 누명 벗은 목사/ 2013-07-20

2013-08-04|조회 420
40년 만에 살인 누명 벗은 목사

파출소장 딸 살인 누명…"26억여원 배상하라"
류인하 기자

군사독재 시절 파출소장의 9살 난 딸을 살해한 누명을 쓰고 15년간 옥고를 치른 정원섭 목사(79)가 국가로부터 26억여원을 배상받게 됐다. 재심을 통해 무죄확정판결을 받고, 그간의 피해보상을 받는데 41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돈으로 피해를 환산하기에 공권력에 의한 피해는 너무나 컸다. 그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버지는 숨졌고, 가족들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뿔뿔이 흩어져 숨죽이며 살아왔다.

1972년 당시 춘천지역에서 만화방을 운영해오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얼마 전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것이었다. 9월 27일, 춘천경찰서 파출소장의 아홉살 난 딸 장모양은 춘천시 우두동 논둑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장양의 몸에는 성폭행을 당한 흔적까지 남아있었다.



(출처=정목사의 현장검증과 관련한 경향신문 1972년 10월 13일자 기사)
당시 내무부는 이 사건을 ‘4대 강력사건’으로 규정하고 10월 10일까지 범인을 잡지 못할 경우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는 ‘시한부 검거령’을 내렸다.

경찰은 장양이 자주 다닌 만화가게 주인 정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사건 당일에는 피해자가 만화방에 온 적이 없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그는 검거시한인 10월 10일 돌연 “내가 장양을 죽였다”며 모든 혐의를 시인했다. 경찰의 가혹행위를 이기지 못하고 거짓자백을 한 것이었다.

경찰은 사건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까지 조작했다.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빗과 연필이 갑자기 정씨의 것으로 둔갑했다. 당시 아홉살이었던 정씨의 아들조차 “그 파란 연필은 내 것”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게 여 종업원도 경찰의 가혹행위를 당한 뒤 “정씨의 빗이 맞다”고 진술했다. 종업원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정씨는 검찰조사에서도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모든 혐의를 부인했지만 그는 결국 강간치상 및 살인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법정에서도 “장양이 살해당했다는 그 시점에 집에서 일하는 목수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부인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범행의 최초 목격자였던 이모씨는 1심 재판에서 “현장에서 목격한 연필은 누런 빛깔이었다”라고 진술했다가 위증혐의로 구속됐다. 구속상태에서 또다시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이씨는 “파란 연필을 봤다”고 말을 바꿨다.

계획적인 증거인멸 및 바꿔치기를 숨기기 위해 경찰이 증인마저 거짓진술을 하게 만든 것이다.

법원 역시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않았다. 정씨는 이듬해 11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그는 15년여를 복역한 뒤 1987년 성탄절을 하루 앞두고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정씨는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과 2009년 무죄를 선고한 재심판결 결과를 갖고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정씨의 무죄는 2011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는 무죄가 확정되던 날 “너무 늦게 찾아오기는 했지만 ‘사필귀정’이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3부(박평균 부장판사)는 정씨와 그의 가족 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6억3752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구금 1년도 안 돼 아버지가 충격으로 사망했고 가족들도 주위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동네를 떠나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며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