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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반도의 여진족 후예들

2009-03-01|조회 646

현대 한반도의 여진족 후예들

여진족 또는 만주족은 중국 민족이나 한민족으로부터 변방의 오랑캐

정도의 이류(二流) 민족으로 경시 당하며 살아왔는데 때로는 아골타나

누르하치 같은 영웅이 나오면 강한 국가를 만들어서 중화민족이나

한민족을 위협하거나 정복하기도 하는 이상한 저력이 있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 저력으로 중국을 점령해서 300년간 다스린 것이

그들 민족 소멸의 길을 열었다.

피정복 민족의 문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중국의 문화와

중국의 언어와 중국의 글자를 채택한 것이 만주족을

전부 중화족으로 흡수당하게 만들었다.


[여진어 또는 만주어를 지금도 쓰는 만주족 후예가

 현재에도 존재하기는 한다.

 청시대 신강성에 만주 군대 15,000명을 파견해서 주둔시켰는데

 이들 후손들은 만주어를 쓴다.

 그러나 만주족이 아니라 시보족이라는 다른 족을 창시해서
중국
동북지방의 만주족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


과거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를 간판으로 했던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국이었으나 그런대로 만주족들 국가의 재건의
실낱같은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괴뢰 만주국은 패망하고 영토는 중국이 차지했다.

50년대 중국 혁명에서 한 역할을 했던 고강이 만주국 부활을
꾀 했지만 숙청 된 뒤 자살했다.

그 뒤에 만주족의 독립 운동은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다.


지역 이름도 민족색 짙은 만주에서 중국의 한 지방인
동북 지방으로
바뀌었다. 


만주라는 명사는  중국 정부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어서

옛 만주국도 위만국이라고 어색하게 작명되었고 만주족도

만족으로 그 민족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


만주 일대가 공업화 되면서 한족들이 대폭 몰려 들어와서

살고 있으니 그들의 부활은 더욱 요원해질 듯하다,

- 이 민족 물타기 작전은 중국의 전형적인 소수 민족 억압의

  상투 수단으로 티베트에서 열심히 시행중이다-


지금 말로는 중국에 있는 만주족이 일천만이 넘는다고 하며 그들의

자치주도 다섯 개 정도 있다.


하지만 동포들 말을 들어보면 만주족들은 당안[호적]에 만족이라고

써 있을 뿐,외관상 한족과 아무런 차이를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만주족들은 만주어나 만주 문화등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거나 
만주족으로서 별다른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고 했다.

호적의 기록도 만족에서 한족으로 바꾸는 사람도 많다.


자기 민족의 말과 글도 다 잊은지 오래고 너무 중국화가 진행되어서

이들 만주족은 사실상 소멸되어 가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서론이 길어졌다.
눈길을 좁혀 한반도 안의 역사 쪽으로 돌려보자.


세종 때 야인 토벌에 의해서 육진이 개척되고 조선의 영토가

확장 되면서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살던 여진족[앞에서 이야기한
만주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대부분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북쪽으로 물러간 것으로 보이지만

그 뒤에도 조선의 영토에서 조선인이 되어 살아가던
여진족도 많았었다.


조선 초기의 실록을 보면 야인이라는 부족 통칭으로 이들

귀화 여진인들이 눈에 잘 안 들어오는 이국적인 이름을 달고

자주 나온다.


조선 실록에 등장하는 여진인 중에서 가장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이성계의 의동생격인 통두란, 조선식 개명으로 이지란이다.


여진족  최고의 영웅 누르하치- 지모의 화신으로
불리던 그는 중국을 정복했던 청나라의 태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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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정권 장악 후 벼슬살이 까지 했는데 그 뒤 그만큼의

비중으로 조선 역사에 나타난 여진인은 없었다.


현대 함경도 지역에는  남아있는 여진족들의 흔적들이 있다.

먼저 악명 높은 아오지 탄광의 아오지가 여진어로
검은 돌이라는 말이다.

석탄을 뜻하니 연관이 있는 이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온천으로 유명한 주을[朱乙]이 여진어이다.

뜨거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온천을 뜻하는 명칭이다.


여진어는 이 지역의 일상 쓰는 말에도 흔적을 남겨놓았다.

예전 여진 지역이던 회령 지역 말에 ‘여기-’는 ‘영게-’라 하고

바람을 ‘부럼-’이라 하는 데 이것들도 여진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말은 남겼지만 그 뒤 조선 북쪽 영토에 남은 여진족들은

조선인으로 동화되어 소멸되었을 것이라고 짐작 했었다.


부연하자면 그들의 본거지인 중국 동북 지방에서도 사라진

여진족이 600년의 시공을 건너 뛰어 한국 현대사에 얼굴을

내 밀 줄은 몰랐었다.


고려와 조선에 동화 또는 귀화한 외국인에 대한 약간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 영토에서 외국인으로 살다가 한민족에 동화된
대표적인 민족으로
제주도의 몽골족을 들 수가 있다.


그들은 원나라 때 국영 말 목장을 제주도에 설치한 바람에 상당히

많은 몽골인들이 이주해 와서 목호[牧戶 -목축인]로서 살았다.

친명 반원책을 썼던 고려 공민왕이 최영을 제주도로 보내

몽골인들을 토벌했을 때 저항하던 몽골인들의 숫자가
무려 7,000명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려인이었다해도 전투원이 아닌

노약자들이나 여성들까지 포함하면 제주 거주 몽골인들은

상당수가 될 듯하다.


제주도의 몽골인들은 최영 부대에 소탕되었고 모국인
원나라는
명나라에게 축출되어 몽골 평원으로 쫓겨 갔으니 

이국의 땅인 제주도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제주도의 몽골인들은 재빨리 변신하여 성과 이름도 바꾸고
언어와 문화도 바꾼
철저한 현지인이 되어서 생존의 길을 찾았다.


만주족 전사의 복장 - 건륭제의 근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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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현대에 들어와서 몽골식 이름을 쓴다던가 몽골인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은 제주도에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함경도 지역의 여진인들도 그렇게 되었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나는 1930년대에 [확실한 지역의 명칭은 생각나지 않지만]

함경도를 여행했던 분이 썼던 글에서 어느 산골 마을에 대한

기술을 발견했었다. 


그가 들은 바로 이 마을 사람들은 여진족의 후예로서 

사는 형편은 괜찮았지만 고약한 성미와 안 좋은 행실머리로

주변에서 평판이 나빴다는 짧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나는 이 글로서 여진족의 후예가 20세기까지 살아남았음을

알고 매우 놀랐었다.

그들이 여진족의 후예라고 주변 주민들 차별 대우를 받고

주변 마을들에  매우 적대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멸시받고 천대받는 집단들은 대개 호전적인 태도를 가진다.]


그러나 이 글의 시대적 배경만 해도 1930년대이니 나로서는

그 뒤의 일을 알 길이 없었다.


북경 자금성 건청문에 걸린 만주어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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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출처로부터

그들 현대에 북한 땅에 남은 여진인들 대한 추가 정보를 얻었다.

그 출처란 북한의 김정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김정일은

남한 기자들에게 아직도 여진 성과 이름을 쓰는 여진족 후예를

발견하고 자신이 한국식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나는 사실 6.15 선언도 선언이지만 나는 
김정일의 이 말에
더 충격을 받았다.


허나 김정일이 이들 현대 여진인의 이름을 빼았고 억지로 한국식

성과 이름을 부여한 것은 자못 유감스러운 일인 듯하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외국인 후손들의 가문이 있다.

월남의 왕손인 화산 이 씨도 있고 명나라 때 우리나라에 왔다가
정착한
성씨의 후손들 모임인 명의회(明義會) 성씨들도 있고
임란 때 한국에
귀화한 김충선씨 후손인 우록 김씨도 있다.


이들 외에 긴 세월 동안 한민족의 땅에 생존했었던,

아니 본거지에서도 소멸되다시피한 여진족의 후예가 합류했더라면
다문화 가정의 시대를 열어가는 한민족사에
다양한 역사적 가치를
더 할 뻔 했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