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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목사의 고민은 무엇인가?

2008-03-14|조회 262
이 시대 목사의 고민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목사의 모습…제대로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꿈꿔야

대개 목사들은 과거 남다른 신앙의 열정으로 교회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식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각 교단에서 실시하는 고시를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뜨거운 열정 하나로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의 길에 입문한다.

물론 형편이 넉넉하여 시작부터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화려하게 목회를 시작하는 이도 있다. 또 주변에 돕는 분들이 많거나 수단이 좋아서(?), 소위 목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보란 듯이 출발하는 목사도 있다.

하지만 많은 목회 초년생들은 집 전세금을 빼서 개척자금을 마련해야 할 정도로 어렵게 목회를 시작한다. 나 역시도 어렵게 목회를 시작했고,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을 견뎌야 했다.

이 시대의 목회자는 많은 현실적 고민을 안고 사역을 하고 있다. 물질과 가족, 자녀 문제 등….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생기는 고민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감동을 주시는데, 나는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하나님은 나에게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하시는데, 세상은 나의 말을 듣지 않는 현실. 하나님은 나에게 회개를 외치라고 말하는데, 세상은 나에게 평안의 복음을 주문하는 현실. 하나님은 나에게 옳은 길, 좁은 길을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길을 가기보다는 편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하는 현실.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부름 받은 우리가 자신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반목하고 대립하는 현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현실에서 목회하는 목사의 가슴을 짓누르는 고민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날의 교회와 목사 그리고 성도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바라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스라엘에 큰 지진이 일어나기 2년 전에 남쪽 유다에서 평범하게 양을 치고 있던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는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생업을 청산하고 북이스라엘로 갔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부활을 위해 생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움직였다.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으로서 북이스라엘로 운명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택했다. 나와 같은 목사들은 아모스처럼 정말로 아무런 사심 없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로 가서 이스라엘의 죄를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지기가 보고 들은 말씀을 전하지만 이스라엘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다메섹·가사·두로·에돔·암몬·유다 등등 남의 나라 이야기를 할 때는 귀를 쫑긋하지만 정작 자기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귀를 막았다.

그러다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선지자의 입을 막았다. 입을 막아도 또 입을 벌리면 선지자를 때리고 핍박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이스라엘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보게 됐다. 의사소통의 단절은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모스의 권고를 거부했던 북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권고를 귀담아 듣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과 의사소통하고 있나

이러한 의사소통 단절의 역사는 비단 아모스 시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 당시에도 나타났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사사건건 대들고, 시험하고, 비난했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인들이 예수님과 소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의사소통이 안 되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하면서 예수님에게 핀잔을 주었다. 또 자기들끼리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을 벌였다. 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머니를 이용하여 예수님에게 은밀한 청탁을 하는 모습 등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와 성도들이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잘 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을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며 찾아왔다.

긍휼히 여겨달라는 그들의 말을 다 들은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주시면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완치되었다는 확인서를 받은 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고 말씀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서 가는 도중 그들의 몸이 깨끗하게 되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 그들은 한결같이 제 갈 길로 갔다.

그러나 그 중 유독 한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후 다시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셨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의미심장한, 어쩌면 지금까지 감추어 두셨던 보배와 같은 말씀을 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한국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열 명의 문둥병자가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자리에 있는가? 주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고 좋아하면서 이제는 또다시 제 마음대로 사는 자리에 있는가?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깊이 깨닫고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감사하는 자리에 있는가?

이제 우리는 아무런 사심 없이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감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목사와 성도로 가득 찬 진정한 부흥을 꿈꿀 수 있다.

진정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그 중에서 으뜸가는 것은 아마도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기심은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기심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반드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며, 타인이 잘되는 것을 속상해 하고 억울해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모습으로 표출된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표출되지 않은 이기심이다. 숨어 있는 이기심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속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의 마음을 자기중심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숨어 있는 이기심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지능과 교묘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대로부터 적인지 아군이지 구분하지 못하게 한다. 앞에서는 웃으며 뒤에서는 욕하는 사람, 겉으로는 위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속으로는 반대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숨어 있는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숨어 있는 이기심의 사람은 욕심의 죄 외에 거짓말 하는 죄와 악한 마음을 품는 죄를 더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건대 이런 이기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이기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 심지어 바른 신앙생활을 지도해야 하는 목회자인 나 자신도 자유롭지만은 못하다. 특히 신앙 안에서의 이기심은 그 심각성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신앙의 출발은 이기심을 버림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기심을 극복한 신앙이야말로 멋진 신앙, 향기가 나는 신앙, 매력적인 신앙, 칭송받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이기심을 버릴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은 이기심을 버리는 것에 실패하여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결국 주님을 부인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목도한 제자들은 이기심을 완전히 극복하고 새로운 능력의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는 이기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예루살렘 시민들로부터 칭송 받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초창기 예루살렘 교회는 매력적이었고, 향기 나는 교회의 모습이었다. 이것은 교회 구성원 모두가 이기심을 버리고 마음을 같이 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실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인간의 연약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께 완전히 압도되지 않고는 이것을 버리기가 쉽지가 않다.

이기심으로 가득 찼던 요나

구약의 선지자 중 요나에게서도 이기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요나는 북이스라엘 출신 선지자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이시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앗수르가 어떤 나라인가. 하나님께서도 요나에게 말씀하셨듯이 악독이 가득한 나라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욘 1:2)

사실 앗수르는 포악한 나라다. 갑자기 강국으로 부상한 앗수르는 주변의 약한 나라들을 침범하여 정복하였고, 그들에게 다시는 반항할 뜻을 품지 못하게 하려고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 목을 잘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고, 사람의 눈을 산채로 뽑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기까지 했다. 그 피해를 이스라엘이 고스란히 당했다. 한마디로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앗수르라는 말만 나오면 치를 떨 정도로 국민감정이 나쁘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나라로 가서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라는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용서하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익히 알고 있는 요나는 도저히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느웨로 가기를 원치 않는 요나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요나가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니느웨가 회개를 하게 되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앗수르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은 반국가적인 이적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요나는 선교사역을 마치고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조국으로 고향으로 친구들에게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매국노란 낙인이 찍힌 채 외톨이로 외국을 떠돌면서 망명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못하는 것은 개인감정은 물론 국민감정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유익, 자신의 입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나가 내린 결론은 40일만 하나님을 피해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시스를 향하여 출발을 하는 것이다. 요나의 행동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명백히 개인적 이기심, 집단적 이기심의 표출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요나처럼 “그것은 할 수 없는데요,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했는지 아세요” 하면서 과거와 화해할 것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잠행을 한다. 마치 내 안에 이기심으로 충만한 요나가 꿈틀대고 있는 듯하다.

겉으론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론 현실적인 이유를 들이대며 제한적 사랑, 내가 하고 싶은 대로의 사랑,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만 사랑하겠으니 나를 이해해달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재요청하는 나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일상의 삶 속에서 너무나 쉽게 접하고 있다. 이렇게 이중적인 나의 모습을 나의 양심이 나에게 고발하기에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이기심의 감옥에서 출옥할 수 있을까? 도저히 나의 힘으론 이 감옥에서 출옥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나의 구주이신 예수님께 죄를 고백하고 있다.

삭개오를 안으신 예수님

누가복음19장에 보면 세리장인 삭개오 집으로 가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삭개오는 나쁜 사람이다. 매국노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로마제국에 붙어 있는 사람이고, 타인을 착취하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환영 받을 수가 없고, 친구도 없다. 그를 아는 사람 모두는 그를 상종하지 못할 죄인으로 취급하고 그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여리고 시민들의 집단감정을 알고 계시면서도 삭개오의 집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행동은 사람들의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한다. 한쪽에서는 분노의 소리, 욕하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한 분노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으로 가겠다는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이것은 마치 한 사람을 얻기 위해 99명을 잃는 타산이 맞지 않는 장사와도 같다.

내일 아침 여리고일보에는 1면 머리기사로 “예수, 삭개오와 친구가 되다”가 나올 판이다. 비난의 댓글이 달리고, 원성의 소리가 들리며, 심지어 죽이자는 소리까지 나올 것이다. 지금까지 믿고 따랐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에게 심각한 고난이 시작될 것이다. 예수님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결코 이롭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외로운 한 사람의 유익만을 생각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격이고 용기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편안함, 자신의 유익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 알고자 하여 뽕나무로 올라갔고, 뽕나무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말씀, 진실한 눈빛, 그리고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예수님을 알게 된 삭개오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진실한 그리고 충격적인 고백을 하게 된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처럼 위대하신 주님 앞에 이기심으로 충만한 나의 본성을 노출시키며, 용서를 간구하며,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하여 용기 있는 행동을 힘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해본다.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변화된 삭개오를 통해 가난한 자들이 숨통이 트이게 되고,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이 억울함이 풀리게 되면서 한순간 여리고시는 기쁨의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나 한 사람이 이기심을 버리고 온전한 주님의 제자의 모습으로 섰을 때 여리고시에 있었던 기쁨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임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며 기대를 한다.

“주 예수여! 나에게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와 힘을 주소서, 그리고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아멘”

황병모 /오산 새소망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