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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사표(辭表)

2008-06-07|조회 252
목사는 만사에 신중해야 한다. 특히 목사가 함부로 사표를 내면 교회에 많은 어려움을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목회자는 어떤 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교회를 섬기다가 떠난다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다. 특별히 목사는 사표를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배우고 깨달았다.

내가 토론토에서 시무하던 교회에서 전임자로 사역을 하다가 분열되어 나가 새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던 목사는 필자와 신학교 동기 동창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목회를 하다가 토론토 한인장로교회로 부임했다.

그러나 부임한 지 2년이 지나면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 목회자는 자신을 지지하는 교인들과 함께 따로 나가 새 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다수의 교인들이 목사님을 따라 나갔다. 그러나 6개월 만에 사소한 일로 그는 사표를 다시 냈다. 진심으로 낸 것이 아니고 정치적 제스처로 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설마 당회가 사표를 받으랴 생각하고 냈는데 당회원 일곱명 중 다섯 분이 받자는데 투표하고 두 분만이 반대해 결국 그 교회를 떠나게 됐다. 그리고 다시 지지하는 분들을 데리고 교회를 시작하게 되어 그 교회는 많은 어려움과 상처를 입게 됐다.

필자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목사는 함부로 사표를 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그래서 13년 7개월 동안 캐나다에서 목회하면서 한번도 사표를 내지 않았다. 어려움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목사가 함부로 사표를 내면 오히려 교회에 많은 어려움이 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섬기던 교회를 떠날 때 사표를 냈다. 그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미국 나성영락교회에 부임한 후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하나의 정치적 쇼로 사표를 던져서는 안되며 일단 사표를 냈으면 반드시 떠나야 된다는 것이 필자의 목회 신념이 된 것이다.

1986년 가을이었다. 다음 해는 마침 섬겨온 토론토 한인장로교회가 2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특별히 그 해 필자의 나이가 50이었는데 한 교회에서 13년이 되고 50살이 되면서 '계속 이 교회에 머물면서 목회를 해야 할 것인가, 한번 목회지를 옮겨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만일 이 교회에서 은퇴를 하려면 30년 이상을 섬기게 되는데 필자 자신에게도 너무 지루하고 교인들에게도 너무 권태감을 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정책당회에서 '내년도 20주년을 지나면서 리더십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기도 제목을 나누고 기도 부탁을 했다.

일년후 문제니까 별 반응이 없이 지나갔다. 1987년 9월 둘째 주일이 창립 20주년 기념주일이었다. 필자는 주일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 당회 서기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원래 계획은 1년간 안식년을 가지면서 목회도 되돌아보고 남은 마지막 목회를 어떻게 보다 뜻있고 보람되면 좀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회가 되도록 할 것인가를 묵상하고 정리하면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일년 후에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어떤 교회든지 청빙이 있으면 순종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성영락교회 김계용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자기가 곧 은퇴를 할 계획인데 후임목사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렇게 훌륭하게 목회하시던 교회를 담임한다는 것이 부담감이 커서 좀더 기도해보고 대답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얼른 마음의 확답이 생기지 않았다. 두 주일이 지나서 다시 김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확답을 주기를 재촉하셨다. 필자는 순종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27년만의 기도 응답이었다. 61년 12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김계용목사님의 은혜스러운 설교와 덕망있는 인격을 보고 저분 밑에서 몇 년간 사역훈련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어 다음날 찾아 뵙고 교육전도사나 부교역자 자리를 요청했더니 한마디로 지금은 자리가 없다고 거절 당했다. 그런데 그 기도가 27년 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박희민 / LA영락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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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양칼럼/ 기본예절

요사이 주위의 목사님들이나 일선 교육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 보면 한결같이 염려하는 소리들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 비해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강퍅하고 무례하다는 것이다. 너무 자기 중심적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어른들뿐만 아니라 젊은이들,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하여 일반적인 모습이 되어버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매 일반인데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무너지면서 동방예의지국이라 자랑했던 우리 나라 젊은이들의 예의지수가 동양의 여러 나라 젊은이들 가운데서 가장 낮은 마당에 굳이 교회 안에서만 예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또 사회의 모든 권위가 부정되고 있는 마당에 굳이 교회 안에서만 그러한 권위가 살아있어야 된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도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예(禮)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성경도 그런 부분에 대하여 엄중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옳고 마땅하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예를 구별하여 엄격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교회 내에는 엄연한 직분이 있다. 우리가 교우들을 부를 때 가능한 그 직분의 명칭을 꼭 붙여서 호칭하고 호칭 뒤에 존대를 붙여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비록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을 부를 때에도 그런 예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무심코 식당이나 공공 자리에서 본의 아니게 교인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면 정말 낯이 뜨거워질 때가 너무 많다. 대화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호칭부터가 엉망이다. 같은 목사, 같은 장로끼리 이야기하거나 혹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본 교회 목사, 장로, 집사, 권사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에 '그 사람, 게, 그 양반, 아무 아무 씨, 심지어는 무슨 놈, 무슨 ××...'등의 속어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용한다.

정말 창피하고 낯 뜨거워 견딜 수가 없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 또 그렇게 해야 자기들의 권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제 삼자가 듣거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을 때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나 전도를 위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나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가뜩이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들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보여주면 어찌 되겠는가?

하루는 어느 연세 드신 목사님이 교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들릴 기회가 있어서 그곳에 잠시 앉아 계셨는데 옆에 교회에 중직을 맡아 보이는 분들이 한참 자기 교회들에 대하여 나누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다. 듣기에 참 민망스러운 대화였다. 그러던 차에 다른 사람이 합류하여 대화를 계속하였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너의 집 큰 머슴은 잘 있냐?"고 하면서 상대방의 목사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자 잠자코 계시던 목사님께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서 "이야기 좀 합시다. 여기 머슴이 있소" 하고 그 이야기에 끼어 들었다고 한다. 이쯤되면 그 다음 이야기는 알만 하지 않은가?


장 창 만 / 록원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