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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2008-06-07|조회 201
송인규/합신대 조직신학 교수

목회자는 원하든 원치 않든 다른 목회자와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또 자신을 다른 목회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런데 비교의 결과 종종 마음이 불편하고 심란해지곤 하기 때문에, 비교를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 꺼리게 되고, "비교하지 마시오!"라는 금령을 철칙인양 소개한다.


이러한 충고는 이해할 만하다. 예를 들어, 여기 같은 지역에 소위 괄목할 만한 교회 성장을 이룩하고 세인의 주목을 끌고 있는 한 목회자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자세히 알아본즉 그는 실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조건 하에서 그러한 사역을 감당한 것이었다. 그러면 그의 소문을 들은 다른 목회자는 자신을 그와 비교하면서, "도대체 나는 뭐람?", "내가 목회자로서 무엇이 부족하길래 저 친구와 같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대관절 어떻게 해야 좀 더 교회가 부흥할 수 있지?" 라고 자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은 실망, 좌절, 부러움, 질투, 패배감, 자포자기 식의 태도, 의욕 상실 등으로 뒤엉키는 것이 보통이다.

비교가 가져오는 이와 같은 폐해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될 수 있으면 비교를 피하려 들고, 비교하지 않는 척하며, 또 비교라는 괴물을 백안시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비교 기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깊숙한 수준에서 우리의 정신 작용에 관여하고 있다. 비교 기능이 발휘되는 것은 많은 경우 거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중요성과 필수성을 놓치고 산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사항 -- 인간의 자기 정체 파악 및 공동체 내에서 직분자를 선택하는 일 -- 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활동에는 비교 기능이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만일 그러한 기능의 발휘가 없다면, 자아상 형성이나 지도자 선발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후자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의 예(행 6:1-7)를 들 수 있다.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빠져서 불평할 때, 열 두 사도는 업무 분장을 시도했고, 구제 사역을 위해 일곱 명의 일군을 선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선택해야 할 일군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와 믿음의 충만 (행 6:3, 5)이었다. 그렇다면 일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자격자와 비자격자의 상태를 비교해야 한다! 누가 다른 이들보다 더 성령으로 충만하고 더 믿음으로 충만하며 더 지혜로 충만한지 비교해 보아야지만, 자격 조건이 되는 이들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진정한 자기 파악의 경우에도 비교 기능은 필수적으로 발휘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고전 15:9) 때문이었다. 사도란 원래 교회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법(cf. 엡 2:20)인데,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여 무너뜨렸으니 감히 사도로 불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일일이 비교해 본 때문이었다. 만일 바울에게 그러한 비교 기능이 없었다면, 결코 진정한 자기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토록 비교 기능은 우리의 정신 활동에 있어서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방금 예로 든 자기 파악이나 지도자 선택 말고도 수없이 많은 활동들은 실상 "비교"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왜 비교 때문에 실망과 좌절과 자기 연민과 질투가 야기되기도 하고, 반대로 진정한 자기 파악과 지도자의 올바른 선택이 가능하게도 되는가? 이것은 비교 기능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교 기능을 활용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비교 기능이 올바른 마음의 방향에 지배를 받으면 바람직한 정신 활동 - 진정한 자기 파악, 지도자의 올바른 선택 - 이 나타나고 반대로 죄악된 마음의 방향에 사로잡히면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정신 상태가 야기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마음의 방향을 자아 사랑,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의 세 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cf. 마 22:37-40). 즉, 우리의 비교 기능이 오직 자아 사랑만의 지배를 받으면 마음에 일어나는 정신 활동은 부정적인 것이 되고, 같은 비교 기능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일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바람직한 정신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비교 기능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도 비교 기능을 필수적 도구로 차용하는 우리 마음의 방향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아 사랑 - 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할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면, 나와 타인의 목회 상황이 이렇든 저렇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비교 기능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목회 사역이 다른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릴 때 우리는 교만해지고 다른 목회자들(특히 우리보다 못 한 이들)에 대해 자랑과 뽐냄으로 나서기가 쉽다. 또 반대로 우리보다 뛰어난 목회 사역의 수행자들을 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주눅이 들고 지나친 부러움과 질투심, 또는 폄하적 충동으로 가득하기가 쉽다. 이 모든 반응들은 비교 기능 자체보다는 비교 기능이 자아 사랑만의 방향에 의해 지배받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꼭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방향이 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쪽으로 움직이도록 힘써야 한다. 만일 마음이 방향이 그렇게 잡힌다면 우리의 비교 기능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만일 나의 목회 사역이 다른 이들에 비해 뛰어나다고 해도 나는 바울 사도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라고 고백할 것이다. 우리의 비교 기능은 자신을 낮추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 분의 은혜만을 높이는 놀라운 결과를 초래하도록 사용된 것이다.

또 반대로 나보다 탁월하게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우리의 비교 기능은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할 것이니, 이는 상대방에 대한 차이의 인식이 그를 통한 하나님이 역사를 발견하도록 자극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세례 요한처럼 다음과 같은 염원을 표현하게 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 우리보다 훌륭한 사역자를 두시기 기뻐하셨고 그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비교 기능은 이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열망을 낳는 법이다.

어차피 인간은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목회자도 마찬가지이고, 특히 목회 사역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비교 활동이 이루어진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지배를 받고 무엇으로 가득해 있느냐의 문제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충만한 이상, 목회 사역에 대한 비교는 겸손, 하나님 높임, 동료에 대한 인정,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기쁨 등 하늘의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