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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자 김창수 선생

2008-06-17|조회 348
몸으로 전하는 예수

<주간 기독교>


산천초목이 다 아는 사실

대안교육자 김창수 선생


◇녹색대학 창립위원회 발족식 때. 우측 두 번째가 김창수 선생.
늦둥이, 잡초, 뒷간은 다 김창수다
대여섯 살 계집아이와 희고 긴 머리를 붙들어 맨 중년의 남자가 동네 어귀에 서 있다. ‘대낮 시골에도 어린 여자 아이가 있구나, 필시 손녀임이 분명하다만 행여 실수할지도 모르니 그냥 은근슬쩍 인사만 하자.’

기자가 고상한 처신머리를 염두하고 있을 때, 김창수(47) 선생은 늦둥이 이레에게 인사를 시킨다. 고등학생, 중학생 아들을 둔 이가 마흔 넘어 얻은 아이, 그의 집 마당과 뒷간(화장실), 뒷뜰의 울창한 대숲은 그가 누구인지 복선을 깔아주고 있었다. 마당 가득 연보라 자운영, 토끼풀이 사람 다니는 길만 간신히 내준 채 푸른 대를 곧추 세우고 바람에 거들먹거린다. 당연히 집 안에 있어야 할 화장실이라는 곳도 마당 귀퉁이의 헛간이다. (통하나 묻지 않고 그냥) 바닥에 둔덩산 같은 쌀겨 가마니, 발 디딤판 하나가 전부다. 검누렇게 눌러붙은 똥덩이가 쌀겨와 함께 발효되노라니 그 암모니아가스를 누군들 감당할까. 어디 가스뿐인가. 내가 싼 배설물은 물론이요, 다른 이의 것까지 내일도 보고 모레도 보고 두고두고… 밭에 거름으로 짊어내기 전까지는 식구처럼 봐주어야 한다. 그가 사는 대안적 삶이다.

김창수 선생을 얘기하다 말고 서설이 길어졌다. 하지만 그의 마당 가득히 주인 행세하는 잡초의 뻔뻔함이, 미간 구겨지는 뒷간이 그이다. 좀 도가 트인 이들은 이러쿵저러쿵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가 보다. 살아버리지. 그 마당에 들어서면서 단박에 ‘아, 녹색대학창립멤버다우시네. 폼만 잡는 게 아니었구먼’하고 얼마나 공기 갈라지게 숨을 뱉어냈는지.

대안대학 녹색대학교
얼마 전 녹색대학이 개교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종교계며 교육계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죄 모인 곳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었다. 차일피일 미루던 취재를 앞당기는 기사였다.
“대안학교는 과거 빈민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던 공부방의 확장이라고 이해합니다. 계층간의 괴리에 대한 분노가 시발이 되면 안 되고, 계층간의 균형에 역점을 두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소수자운동(빈민, 환경, 장애인, 동성애자)’이어야 합니다. 단지 소수, 다수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삶의 방식, 선택을 이해하자는 차원에서죠.”

2003년에 개교할 녹색대학에서 그는 ‘이념학제분과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그가 역점을 두고 있는 건 대학원과정의 교육학과 개설이다. 기존의 교사들이 가르치기만 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교육의 장을 만나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안적 교육과정이다. 이는 직업인으로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다는 큰 구실이 우선 있지만, 무엇보다 교육의 변화에 밑거름이 될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교사도 자신을 채찍질해 줄 스승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 앞에 서 있다가 아니라,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연습은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녹색대학은 그런 의미에서 대학이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 한 출발이 되는 것뿐입니다. 첫 시도라는 데 의미가 있지요. ‘의식’에 있어서는 보수에서 진보로 가는 교량역할을 할 것입니다.”


◇무등산 자락이 훤히 내다보이는 마을에는 고색창연한 광산 김씨 시조묘며, 대나무, 소나무가 폼난다. 앵두나무 과수원에서.
선생은 알파와 오메가다
95년에 대안학교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대안학교는 무엇을 가르칠까, 왜 필요한가, 어떻게 가르칠까라는 고민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급하게 시행에 옮겨졌던 탓에 탈이 많았다. 그 역시도 이 시기에 대안학교를 만들겠다고 교편을 잡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낙향했었다. 그 무렵 그는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재직중이었고, 한신대신학대학원도 마쳤을 때다. 그러나 꿈이 현실화되어 가는 과정은 그를 오히려 좌절로 몰아세웠다.

“꿈이 제도화되어 가는 과정의 아픔, 사회적 책임감이 힘들었습니다. 96년 10월에 제안했던 푸른꿈 학교는 98년 5월에 법인인가를 받았습니다. 그 과정이 참 많은 걸 가르쳤는데, 그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꿈도 중요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푸른꿈 학교를 만들겠다고 몰려든 뜻있는 교사들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구요. 나와 달랐지만 그분들이 학교를 끌어가길 바래 담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1년 반 정도 한빛고에서 교장을 했습니다.”

대안학교는 그의 꿈이었지만 그는 거기서 너무 많은 것들을 이루고 깨닫느라 심하게 앓았다. 그 좌절의 핵심이 ‘선생이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였다며 눈길이 깊어진다.

“내 정체는 종교인입니다. 내 신앙이 어떻게 표현되느냐 했을 때 그 방식이 교육자인 거지 평생해야 할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언제라도 농사도 지을 거고 필요하면 선생도 한다는 것이죠.”
그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랑은 그리움이다”라고 했던 대답은 그가 지난 시절 교육자로서 실패했다고 여겼던 부분에 대한 위로이고 답이었을까. 느릿느릿 이어가는 말 속에, 지금까지는 ‘내가 원하는 선생이었으나 진정한 선생은 학생들이 바라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뉘앙스가 깔린다. 일체 혹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마음,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절대자 혹은 님이 될 수도 있다)을 보고 싶어 하는 그 그리움을 가진 인간이 선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초적인 것(고향, 친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곳으로 아무도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 원초적인 것들은 저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를 보기 위한 통로라는 생각입니다. 교육이란 지식, 정보, 기능적인 교육도 필요하나 거기에 멈춰버리면 인간으로서 경쟁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교육이란 그 너머의 세계, 지금은 희미하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그 원초적인 그리움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자고로 지식전달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공리주의, 존 듀이의 교육방식에 우리의 학교가 흔들리는 거라며 ‘지혜와 철학’이 빠진 결과라고 지적한다. 교육이란 또한 인간이 스스로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남도록 돕는 것이다. 거기에는 사상적 기반과 생활의 독립, 영성의 자유,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백발의 긴머리, 한빛고 시절 장발의 남학생들을 옹호하느라 기르게 되었다는데, 긴 머리칼의 위력은 그와 어린 학생들에게 자유혼을 일으킨 걸까. 봉두난발의 반백에서 전봉준의 기운이 잡힌다. 끈도 없는 등산화를 질질 끌며 그는 또 어디를 휘적휘적, 헌걸차게 걸어낼 것인가. “나는 불행한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정혜영 기자 pcweaver@cnews.or.kr
<주간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