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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나라와 함께 아픈 6.25전쟁을 잊지말자/ 2015-06-29

2015-06-29|조회 362

 

 

10년간 금지되었던 6.25노래

 

  1.

아아 잊으리라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치며 의분에 떤 날을

2.

아아 잊으리라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더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례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를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릴 이 나라의 겨례

 

 

 

 

북한군의 서울 침공



▲ 1950. 9. 29. 서울 탈환 환영대회 직전의 중앙청 홀,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 장군 ⓒ2004 NARA



▲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2004 NARA


▲ 1950. 8. 22. 불을 뿜는 전함ⓒ2004 NARA

 




 
XXX- 6.25 동란 귀한 사진자료|♡그때 그시절♡

6.25 동란 귀한 사진자료|♡그때 그시절♡

 

여기 실린 사진은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5층 사진자료실에 보관된 "KOREA WAR(한국전쟁)" 파일의 사진들입니다.
날짜와 장소는 사진 뒷면에 있는 영어 원문을 따랐고, 사진 설명은 원문을 참조하여 필자가 가다듬었습니다.

이 사진이 기록물이 부족한 우리나라에 자료로 남기를 바랍니다.
생사가 교차되는 전선에서 귀한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들에게 경의를 드립니다.<필자 주>



▲ 1950. 10. 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

누가 그들을 죽였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

보관청



▲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23. 머리에 이고 등에 업고 앞에 붙들고... 고단한 피난 행렬.ⓒ2004 NARA




▲ 1950. 7. 29. 경북 영덕,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지향없이 떠나는 피난민

행렬.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뜨거운 전우애" 한 병사가

부상당한 전우를 업어가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마을 소년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야간전투후 주간 취침.ⓒ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7. 29. 취침 후 병기 손질ⓒ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4. 피난민들의 보금자리 산동네

판자촌ⓒ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 1950. 8. 8. 다리 아래 피난민 움막ⓒ2004

미국 문서기록보관청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0. 1. 3. 1·4 후퇴를 앞두고 불타고 있는 서울 시가지ⓒ2004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



▲ 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2004 박도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더구나 현재의 초등학교(初等學校) 교과서에서 ‘6.25’는 스치는

이야기 정도로 두 세군 데에 나올 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6.25의

노래’는 너무나 생소(生疎)하고 이해하기 힘든 노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의 60대 이상 세대들은 해마다 6월이 오면 이 ‘6.25의 노래’를

너무나도 열심히 불렀다.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도 써먹고,

나뭇길에 지게목발을 치면서 목이 터져라 부르기도 했다.

‘니나노집’에서 노래 밑천이 짧거나 떨어지면 대신 부르는 애창곡(愛唱曲)이 되기도 했었다.

 

학교에서는 이 애창곡(愛唱曲)을 부르며 가을 운동회(運動會)를 준비했고,

운동회 프로그램에 빼먹지 않고 들어 있던 기마전(騎馬戰)에서도

두 주먹 불끈 쥐고 이 노래를 부르며 힘차게 '적군'을 향해 내달리곤 했었다.

 

그 시절 기마전 모습

고등학교 시절 교련선생(敎鍊先生)님은 매 구절 앞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어 부르라며 호통을 치기 일쑤였다.

그렇잖아도 이 노래는 애당초 악을 쓰고 부르기에 딱 알맞은 노랫말과

곡조(曲調)를 갖추고 있어 제식훈련(制式訓練)으로 다리 아프고 배고프면

선생님의 호통이 아니더라도 지레 악을 쓰고 부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새, 이 나라에서 ‘조국(祖國)’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고,

‘원수(怨讐)’는 지구상에서 가장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북한(北韓)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일컬어 반드시 ‘조국(祖國)’이라는 호칭을

쓴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조국’이라는 말을 쓰면 훨씬 다정해진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는 무슨 대화에서든 '조국(祖國)'이라는 말이 튀어 나오면

'촌놈'취급을 받지 않으면, '덜 떨어진 인간' 취급을 받는다.

음담패설(淫談悖說)을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이나, 반어적(反語的) 의미의 "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투를 몇 번 섞어 넣어야 지성인(知性人) 취급을 받을 수

있는 반면, 무심결에라도 '조국'이니 '애국'이니 하는 용어를 쓰면 '구닥다리'나

전근대적(前近代的)인 퇴물로 매도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다 북한군(北韓軍)의 6.25남침(南侵)을 듣도 보도 못한 일부 운동권(運動圈)

에서는 그 전쟁에서 죽다가 살아난 세대가 눈을 부릅뜨고 고통의 세월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엄연한 '남침'을 한사코 '북침(北侵)'이라고 집을 부리고 있다.

 

북한군 서울침공 장면

 

(6.25가 '북침'이면 왜 이들이 우리의 수도 태평로

까지 왔을까)

어쨌든 한반도의 남쪽에서 사라진 ‘조국(祖國)’이 그나마 북쪽 땅에서

위력(偉力)을 발휘하고 있으니 다행이랄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의 ‘6.25의 노래’는 차라리 북한(北韓) 어린이들이

불러야 할 노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도 북한은 6.25전쟁을 ‘북침(北侵)’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6.25때 북한군에 의해 '인민의용군'으로

징집된 서울시민들

(우리가 '북침'을 했다면, 어떻게 서울시민들이

미제 'M1소총'

아닌 소련제 '장총' 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할까.

소련에서 우리에게 무기 지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어쨌든 ‘6.25의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事實上) 잊혀진 노래가 되고 있다.

‘민족공조(民族共助)’라는 큰 물살 때문이다.

어느 해이던가, 국방부(國防部)가 제작한 포스터에 국군과 북한의 인민군

(人民軍)이

형제처럼 나란히 다정하게 그려져 있어서 말썽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원수(怨讐)’와 ‘적군(敵軍)’이 어느 한 순간 그림 한 장으로 ‘친구’와 ‘형제’가

되어버렸던 이 해프닝도 ‘민족공조’의 큰 그림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동안 6.25의 노래를 두고 그 가사가 초·중등(初中等)학생들이 부르기에는

너무 섬뜩하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생각해도

가사가 너무 극단적(極端的)인 용어로 구성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를 함께 나눈 동족으로서 평화로운 이 나라를 침공하여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저들은 '원수'일 수밖에 없었고, "쳐서 무찔러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었다.

사정이 이러했는데도 지금 세대들은 그 노래가 대단한 오류(誤謬)라도 있는 양

비난일색(非難一色)이다. 이뿐이 아니다. 이 노래의 근원인 '6.25동란' 자체를

마치 없었던 일이거나, 우리 쪽이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사단이나 되는 것처럼

슬그머니 교과서(敎科書)에서도 지우고, 노래책에서도 지우고 있다.

털끝만큼도 본받을 일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일본인(日本人)과 일본정부의 근

성(根性) 이라도 닮았으면 한다. 63년전 순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나라 어버이들과

어린 여성들을 보국대(報國隊)와 정신대로 끌어다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만행을

저지른 일제(日帝) 출신 일본정부 관리들은 지금도 그때의 그것은 만행(蠻行)이

아니었다는 책을 만들어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세뇌교육(洗腦敎育)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그들보다 5년이나 뒤인 1950년, 평화로운 일요일을 즐기던

우리들의 머리위에 포탄과 폭탄(爆彈)을 쏟아 부어 100만명이 넘는 무고한 우리

민들을 살상(殺傷)한 북한공산주의자(北韓共産主義者)들의 만행과 '6.25동란'의

참상(慘狀)은 무슨 창피한 일이라도 되는 양 쉬쉬하고 감추려고만 하고 있다.

 

북진하는 국군

(얼어붙은 한탄강을 건넌 이들은 절반도

살아오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된다. 노래의 가사가

지금의 국민정서(國民情緖)에 맞지 않는다면, 그에 맞춰 개사(改詞)를 하면 된다.

그리고 그 개사된 '6.25노래'로 '6.25의 원혼'들을 달래줘야 한다.

가해자(加害者)의 눈치를 보느라 비굴하게 몸을 움츠리지 말고,

100만명의 원혼(?魂)들에게 제사(6.25 기념행사)라도 제대로 드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와 못난 후대(後代)들이 '6.25숨기기'에 급급하고 있는 몰골이 너무나

한심하여 한 작가(作家)가 기존의 ‘6.25의 노래’를 개사(改詞)하여 ‘신 6.25

노래’라는 것을 지어 발표한바 있어 이를 소개한다.

지금의 ‘6.25 노래’가 학생들의 정서(情緖)에 맞지 않는다면, 자기가 지은

노래로라도 그 당시 희생된 원혼(?魂)을 달래주자는 취지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新 6.25 노래

심재방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조국의 산하가 두 동강나던 날을

동포의 가슴에다 총칼을 들이대어

핏물 강이 되고 주검 산이 된 날을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동포 형제를 원수로 만든 그들을

겨레의 이름으로 부수고 또 부수어

선열의 흘린 피 헛되지 않게 시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자유와 민주와 평화와 번영 위해

민족의 공적과 싸우고 또 싸워서

통일의 그 날이 기어이 오게 시리

 

후렴

이제야 이루리 그 날의 숙원을

동포의 힘 모아 하나의 나라로

피의 원한 풀어 하나의 겨레로

이제야 이루리 한나라 한겨레

 

 

 

어쩌다 ‘6.25’에 대한 얘기조차 듣기 힘든 세상이 되어 개사(改詞)된

가사라도 반갑게 생각된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6.25’는 우리 민족사(民族史)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겨준 사변(事變)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큰 피해는 인적피해(人的被害)다.

 

6.25 전상자

 

 

6.25전쟁’으로 인해 우리 국군(國軍)의 사망자는 무려 137,899명에 이르며,

실종자(失踪者) 수는 32,838명이나 된다.

부상을 당한 국군도 450,742명에 이르고 있다.

민간인(民間人)들의 사망자는 학살당한 사람까지 합쳐서 37만여 명에 이르며,

부상당한 사람도 23만여 명에 이른다는 통계다.

여기에다 피난민(避難民)이 240만여 명, 전쟁고아가 10만여 명이나 발생했다.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가 20만여 가정, 청상과부도 20여만명이나 발생했다.

부상자도 그냥 부상자가 아니다. 팔과 다리를 잃고, 악성 총상으로 신음하다가

조금 남은 논밭전지마저 모두 탕진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전쟁고아

(부모는 모두 살륙당하고 병든 개처럼 버려져 있다. 이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미국(美國)을 포함한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3만6천9백여 명이고, 11만6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실종(失踪)되거나 포로가 된 병사들이 6,9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북한군(北韓軍)과 중공군에 비하면 유엔군의 희생은 적은 규모라고 할 수 있지만,

이들은 북한군과 중공군(中共軍) 같이 남의 나라를 침략(侵略)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저들의 침략을 막아 우리나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소중(所重)한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중공군에 생포되는 유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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